이제 있었는지도 잊어버린 금융거래 실명제를 왜 끄집어 내나? 생경맞은 이 과제를 새삼 거론하는 것은 나라도 한번은 이 문제를 이 시점에서 거론하고 가야하는 것 아닌가 하는 책임감에서다. 1981년 장영자금융사건이 일어나 한국의 자본시장이 쑥대밭이 되었을 때 다 망가진 마당에 그래도 금융실명제라도 건지자 하는 소박한(정치권에서는 우리를 백면서생이라 했다) 마음에 당시 재무부 일각에서 들고 일어난 것이 금융실명제였다.
여러 난상토론이 있었지만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원론적으로 찬성을 하던 일반의 지지는 정치권을 중심으로 곰곰히 내 이해는 어찌되나 따져본 다음 결론은 반대로 돌아섰다. 새 제도하에서 정치자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를 궁리하던 정치권은 특히 당시 여당인 공화당도 준비부족을 구실로 반대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명분상 내칠 수가 없던 당시의 국회는 이 제도을 5년 후(1986년 이후) 정부가 정하는 시기부터 시행한다고 하는 해괘한 부칙을 삽입하여 금융실명거래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그 5년이 지난 후 다시 6년이 지난 1992년 김영삼정부에 의하여 금융실명제는 시행에 들어갔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된지 18년이 지난 지금 한국사회에는 이 제도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지금 금융가에는 어느 금융인이 금융실명법을 위반하였다 하여 이의 처벌 여부가 관심이 되고 있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이 금융인의 차명계좌가 1000개가 넘는다고 하고 있고, 그 금융인은 관행적으로 이루어진 일들로 치부하고자 하는 듯 하다. 여기서 나는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왈가왈부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것은 금융당국과 사정기관이 알아서 할 일이고 나는 이 제도를 끄집어 냈던 한 사람으로서 반성하고자 하는 뜻으로 몇가지 문제을 제기해 본다.
우선 한국인의 불공정 의식을 생각한다. 그동안 한국인들 중 금융실명제 위반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문제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소위 권력층에서 이런 사건이 크게 문제된 것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과문한 면도 있겠지만 정치권이나, 지금처럼 금융업당사자가 직접 실명제 위반을 이르켜 문제가 된 경우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금융실명법이 잘 작동되어 불법사례가 줄어들어서 그리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덮어 두었을 개연성이 더 많다. 그렇다면 무엇하러 금융거래를 실명화하도록 법제화 했단 말인가? 사실 행위에 대한 객관적 정당성, 합리성, 논리성 보다는 남들도 하는데 하는 자기변호성, 은밀성 등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한국의 독특한 문화를 간과한 대목이다. 요즘 정부가 내 세우는 '공정'의 화두도 따지고 보면 비슷한 범주의 규범과 현실의 괴리를 우리에게 안겨줄 가능성을 놓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 제도 도입 초기 강조되었던 것은 이것을 남의 뒷조사에 중점적으로 사용할 경우 이 제도의 본래의 취지를 살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를 시행한 김영삼정부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 모두 이 제도를 남의 뒷조사에 보다 중점을 두어 사용하였다. 그러니 금융거래의 지하화는 더욱 깊어만 갔고 관행은 고쳐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제도 도입 초기 이렇게 현대생활이 기계의 지배하에 있게 될 것에 대한 예측이 부족하였다. 사실 금융실명거래제도가 도입되지 않았을지라도 현대의 IT를 중심으로한 기계문명생활은 모든 것을 감추면서 또는 얼굴을 감추고 또는 남의 이름을 빌어서 행동하는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거래의 지하화는 기계의 이용과 함께 점차 줄어들고, 자연스럽게 실명이 확인되는 거래가 정착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이제도 도입을 원천적으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이 제도 시행을 잘못한 정부나 권력을 장악한 계층의 잘못이지 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은 물론 아니다. 또 선진된 사회를 지향하는 작금의 한국사회가 금융거래의 실명화를 땅에 묻어두었을 경우 거래의 선명도는 더욱 떨어지고 사회범죄는 더욱 늘었을 것이다. 그리고 금융산업의 발전도 그만큼 뒤쳐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을 보면서 공연히 제도만 만들어 남의 뒷조사의 도구 노릇이나 하게 만들고 말았다는 자책이 들고 있음은 어쩔 수 없다.
금융업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 제도가 있음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그 많은 비실명거래를 관행적으로 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많은 비실명구좌를 조사하고서도 엉거주춤 꾸물댄 금융감독원의 태도는 무엇인가? 이 사건을 쳐다보는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하나도 금융실명거래제를 위반하지 않았다고 자신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제도가 있으면 무엇하나 제도는 수단에 불과하다. 문제는 그 제도의 취지대로 현실이 발전해가는 것이 중요한것 아닌가. 잃어버린 30년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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