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기회에 '장보고 중국유적지 답사'여행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국해양재단의 주선으로 지난 주 10월 15일 출발한 우리 일행은 중국 웨이하이와 옌타이를 거쳐 칭다오를 들러보는 2박3일의 여행을 하게 되었다. 지금부터 약 1200년 전 신라인으로 중국 산동반도와 일본을 연결하는 3각무역을 총괄한 장보고대사의 유적을 찾아보는 여행길이다.
나는 부끄럽지만 솔직히 말하여 장보고대사의 큰 업적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왔다. 단순하게 신라시대의 해상왕이라는 초등교육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손주 놈이 노래로 역사공부 할때 옆에서 들어본 것이 장보고 대사에 대한 나의 지식의 전부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참여동기 자체도 중고선생님들의 여행길에 선상강의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어 배타는 호기심에 좋다고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내가 순전히 가르침을 받는 이런 스터디투어로 바뀌어 나는 의외의 큰 소득을 얻게 되었다.
나는 무엇보다 해상왕 장보고 선조의 큰 위업 앞에 옷깃을 여미고 경의를 표하였다. 790년경 탄생하신 것으로 추측되는 장보고대사는 841년 피살될 때까지 조국 신라와 중국 그리고 일본을 아우르는 3각무역을 일으켜 이를 관장한 선각자이시다. 그에게는 시대에 따라 당나라에서 무령군소장, 신라로부터 청해진대사, 진해장군등 여러직함으로 불렸지만 그에게 지금 합당한 직함을 붙인다면 해상왕이 적합할 것 같다. 장보고대사는 중국 산동반도에 신라방을 만들어 신라인들의 활동무대를 구축하고, 이어 신라조정에 탄원하여 신라 최남단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만듦으로써 3각무역의 본거지를 구축하여 이를 토대로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총괄하고 지배한 위대한 우리의 선조이셨다.
우리 모두는 이순신장군을 왜군 앞에서 조국을 구한 위대한 선조로 존경한다. 이순신장군이 더 위대하였던 것은 당시 나약했던 조선 문신들의 모함과 질시 그리고 배척 앞에서 굳건하게 버티면서 앞에 닥아오는 왜구를 끝까지 퇴치한 자랑스런 우리의 선조이셨기때문이다. 지금도 광화문 네거리를 지날때 한국인이라면그분의 동상 앞에 언제나 숙연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장보고 해상왕은 임진왜란보다 800년이나 앞서 중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무역거점을 이룬 분이다. 이순신장군이 침략하는 왜적을 물리친 우리의 빛나는 무관선조이셨다면, 장보고대사는 당시 신라 중국 일본을 아우르는 아시아 경제권을 제패한 해상왕 선조이셨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많은 한국사람들은 지금도 이순신장군은 잘 알고 존경하지만, 해상왕 장보고는 잘 모르고 살고 있다. 그 이유는 물론 긴 시간 간극이 가져오는 망각이 제일 클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우리 못난 후손들이 그의 위대함을 발현시키지 못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배운 것은 당시 장보고대사의 세력이 강해지자 신라왕조 선비들이 그것을 맊고자 자객을 시켜 장보고를 살해하였다. 물론 전후사정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당시의 문신들은 자기들의 세력을 지키기위하여 장보고를 제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필생의 사업으로 이루어놓은 청해진을 폐쇄해 버린 것이다. 조선 땅에 어렵게 만들어 놓은 국제무역의 본거지를 없엠으로서 해상무역을 원천봉쇄한 것이다.
그리고 더 참담한 것은 장보고의 업적을 사실(史實)로서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장보고의 업적은 중국이나 일본문헌들에는 존재하고, 그것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원용하여 전하여지고 있다고 한다. 장보고대사의 업적은 훗날 일본의 엔닌(圓仁)대사의 일기를 통하여 전하여지고, 그것을 미국의 역사학자이며 당시 주일미국대사이었던 라이샤워의 책으로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 후손으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당시 우리의 선조들은 장보고대사의 업적을 역사로 남기지 않았을까? 왜 중국이나 일본 그것도 미국사람까지 훌륭한 해상왕으로 칭송하던 장보고 대사의 일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당시 중국인이 조선을 깔보는 동이(東夷)이었기 때문일까? 또 장보고가 미워 살해하면 되었지 왜 청해진을 폐쇄하여 해상무역의 본거지 조차 없에버린 것일까? 만일 청해진이 그대로 남았으면 훗날 누가 다시 해상무역을 시도하고, 제2의 장보고대사가 나오지 않았을까? 3면이 바다인 조선반도가 다시 바다문을 쳐닫은 신라시대 우리의 못난 선조의 모습을 우리는 본다.
그리고 다시 800년의 세월이 흘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왕조는 갈팡질팡이었다. 만일 이순신장군이 없었으면 과연 조선조는 지탱 될 수 있었을까? 그래서 풍전등화에서 왕조를 구한 조선선비들은 개과천선 국방에 목숨을 바쳤나? 아니다. 다시 당파싸움만 하며 세월을 다 보냈다.
그리고 다시 200년 세월이 흘러 1894년 전봉준의 난이 일어난다. 가렴주구에 빠진 지방토호에 맞선 전봉준은 동학난을 일으킨다. 불과 200년전 임진난을 치르고 난 이씨조선 문관들은 사색당파 싸움에 여념이 없던 차 전봉준의 난을 보고 어마뜨거워라 하고 청나라에 구원병을 청한다. 사실 현재의 전북지역에서 일어난 일종의 지방민중봉기 하나를 제어하지 못하고 그것도 외국에 원병을 청한 당시 조정의 우리 선조가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
불과 200년전 이순신장군의 살신보국의 충절은 후손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이를 계기로 왜군의 발호가 조선반도에서 일어나게 만들었다. 이것이 결국 청일전쟁의 단초가 되고 1905년 일본은 조선왕조를 찬탈 한다. 여기에 우리의 못난 선조의 모습이 있다.
만일 우리 선조들이 1200년전 장보고의 해상왕국을 지키려는 자세를 가졌었더라면 오늘날 우리 한반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 가정이야 없지만 장보고 이후 700년 800년 후 영국 불란서 독일 네델란드 스페인 포르트갈 등 많은 해양진출국가들이 중국대륙을 침탈하였다. 중국대륙을 마치 큰 소에 비유한단면, 이런 외세들은 소의 발, 꼬리, 다리, 허리 할 것없이 야금 야금 중국대륙을 먹어갔다.
그때에 중국의 산동반도에 조선의 무역기지가 있었다면 어떻했을까? 기록에의하면 당시 중국에 5만여에 달하는 외국인이 들어와 이있었다는데 그중 신라인들이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 독일인, 화란인들이 그렇게 쉽게 산동반도를 차지할 수 있었을까? 아니 신라인이 산동반도를 자기들 것으로 차지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임진난 이후 조선조 후기 선비들이 국력을 국방과 경제력에 나누어 힘을 길렀으면 조선이 그렇게 어이없게 무너졌을까? 200년도 안 되어 지방에서 봉기가 일어나자 우리 선조는 우선 외국에 그 진압을 부탁하는 못난 짓을 하고 나섰다.
또 그리고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다행이 오늘을 사는 우리는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 단군 이후 처음 맞은 이 경제적번영 앞에 우리 모두 뿌듯한 마음이다. 그러나 오늘이 오기까지 우리 모두는 많은 우여곡절과 어려움을 겪어왔다. 6.25 김일성남침, 절대빈곤, 경제개발계획추진, 민주화쟁취 이런 일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역사이다.
그렇다고 장보고 이후 우리 선조는 모두 못난 선조이고 오늘을 사는 우리는 잘난 후손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우리 선조들도 현재의 우리 못지 않게 훌륭한 선조였다. 다만 역사를 되짚어보면 이런 못난 면도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지금을 사는 우리의 못난 면은 또 얼마나 많을까?
무엇보다 현재 우리의 폐쇄성을 제기하고 싶다. 장보고 이후 보여준 신라인들의 폐쇄성이나, 이조 후기 우리선비들의 폐쇄성은 오늘 우리를 후회스럽게 한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는 어떤가? 지금은 개방이나 무역자유화가 우리에게 그리 큰 이슈가 아니다. 그러나 불과 30년 전 1970년대 후반 한국경제가 개방을 시작할 때 정치권은 말할 것 없고, 한국의 모든 언론들조차 개구일성 반대였다. 지금 한국을 대표하는 큰 신문들이 앞장서 당시 정부의 무역자유화나 섣부른 개방이 나라를 망친다고 비난하였다. 옛날 폐쇄성의 부활이다. 부존자원이라고는 사람밖에 없는 한반도가 그것도 북쪽은 막혀있어 3면밖에 없는 섬나라 같은 한국이 발전할 수 있는 길은 개방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신라의 장보고 때나 지금이 무엇이 다른가? 개방을 하려면 경쟁력을 길러야한다. 경쟁력은 기술개발이나 물가가 싸야 가능한데 그를 위한 안정화노력과정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얼마나 고초를 겪었나? 임금동결, 추곡수매가동결, 예산동결등 지옥같은 세월을 우리는 겪었다. 1970년대 말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반대세력 앞에 맨몸으로 칼 앞에 서야만 하였다. 그 시절이 없었으면 어떻게 한국이 기술개발이 되고, 재정이 건전하여지고, 물가가 안정되었겠나? 거저 찾아온 발전은 없다.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 앞에 놓인 장애는 두가지다. 그 하나가 정치권의 근대화다. 지금 우리가 보수. 진보하면서 억지로 편갈라 싸울땐가? 대통령을 잘 못 뽑으니 NLL이 있느니 없느니한다. 영토권을 포기하는 것도 대통령인가? 이 책임은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아직도 잔당들이 남아 기네 아니네 하지만, 지금 다 지나간 이슈가지고 패거리 싸움만 하는 것이 정치권이다. 구태고 폐쇄성이다.
MIT대학의 에이스모글루는 그의 최신 저서 'Why nations fail?'에서 나라의 패망역사는 개방이 아닌 붕당. 폐쇄성에서 찾았다. 지금같은 우리의 패거리 정치풍토는 조선시대의 사색당파싸움을 연상시킨다. 빨리 제거되어야 할구태이다.
다음은 아직도 역사의 저녁노을 구름 뒤에 숨어있는 것 같은 종북세력의 문제이다. 이념의 시대는 이미 지났고 한국의 종북세력도 이념보다는 단순이 북괴를 따르는 무리에 불과하고 그 수도 소수에 불과하다. 어느시대나 이런 세력들은 있게 마련이지만 이들은 어떻게하면 현재의 번영을 무너트릴 것인가를 꿈꾸고 있다. 우리 사회가 그들에 대하여 너무 너그럽거나, 무서워하는 것 같다. 이들도 하루빨리 자연스럽게 사회의 건전한세력으로 변화 흡수되어야 한다.
나는 장보고대사 앞에서 감히 역사발전의 흐름을 제기하고 싶다. 2차세계대전 후 세계는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나뉘었고, 후진국의 절대빈곤 퇴치와 경제개발에 노력하여 왔다. 자연스럽게 선진국을 중심으로 무역자유화가 화두가 되었고, 세계는 20세기 후반 작은 지구촌을 토대로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거대한 담론을 제기하였다. 세계화 앞에 소수의 개발도상국은 선진대열로 합류하기도 하였지만, 더 많은 수의 개발도상국들은 거대해진 세계경제 앞에 더 작아지는 모습으로 변하였다. 신자유주의를 토대로한 세계화경제운영은 급기야 선진국들 사이에서도 시장이 무너지고, 나라운영이 주저앉는 볼상사나운 모습을 자아내고 있다. 선진국의 치부가 드러난 모습이다.
제3차산업혁명을 주장하고 있는 제러미 리프킨같은 학자는 이제 세계경제는 세계화를 넘어 대륙화(continentalization)로 이행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끼리끼리 이해가 맞는 이웃과 공생하는 경제를 대륙화라고 한다면, 이것이 결국 장보고대사의 해상거점전략과 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장보고대사의 역사는 지금도 살아서 우리 후손의 길을 인도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오늘 우리 앞에 놓인 어려움이나 과제들이 비단 이것뿐이겠나? 그러나 이런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자연스럽게 정리되는 것이 역사이다. 다만 역사 앞에 그리고 장보고대사 앞에 우리는 못난 후손이 되지말아야 한다. 내 자신 좀더 일찍부터 한국경제의 발전동력을 교역의 확대 뿐만아니라 교역확대의 거점을 찾아 나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역시 나는 못난 후손인가보다.
나는 부끄럽지만 솔직히 말하여 장보고대사의 큰 업적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왔다. 단순하게 신라시대의 해상왕이라는 초등교육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손주 놈이 노래로 역사공부 할때 옆에서 들어본 것이 장보고 대사에 대한 나의 지식의 전부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참여동기 자체도 중고선생님들의 여행길에 선상강의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어 배타는 호기심에 좋다고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내가 순전히 가르침을 받는 이런 스터디투어로 바뀌어 나는 의외의 큰 소득을 얻게 되었다.
나는 무엇보다 해상왕 장보고 선조의 큰 위업 앞에 옷깃을 여미고 경의를 표하였다. 790년경 탄생하신 것으로 추측되는 장보고대사는 841년 피살될 때까지 조국 신라와 중국 그리고 일본을 아우르는 3각무역을 일으켜 이를 관장한 선각자이시다. 그에게는 시대에 따라 당나라에서 무령군소장, 신라로부터 청해진대사, 진해장군등 여러직함으로 불렸지만 그에게 지금 합당한 직함을 붙인다면 해상왕이 적합할 것 같다. 장보고대사는 중국 산동반도에 신라방을 만들어 신라인들의 활동무대를 구축하고, 이어 신라조정에 탄원하여 신라 최남단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만듦으로써 3각무역의 본거지를 구축하여 이를 토대로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총괄하고 지배한 위대한 우리의 선조이셨다.
우리 모두는 이순신장군을 왜군 앞에서 조국을 구한 위대한 선조로 존경한다. 이순신장군이 더 위대하였던 것은 당시 나약했던 조선 문신들의 모함과 질시 그리고 배척 앞에서 굳건하게 버티면서 앞에 닥아오는 왜구를 끝까지 퇴치한 자랑스런 우리의 선조이셨기때문이다. 지금도 광화문 네거리를 지날때 한국인이라면그분의 동상 앞에 언제나 숙연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장보고 해상왕은 임진왜란보다 800년이나 앞서 중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무역거점을 이룬 분이다. 이순신장군이 침략하는 왜적을 물리친 우리의 빛나는 무관선조이셨다면, 장보고대사는 당시 신라 중국 일본을 아우르는 아시아 경제권을 제패한 해상왕 선조이셨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많은 한국사람들은 지금도 이순신장군은 잘 알고 존경하지만, 해상왕 장보고는 잘 모르고 살고 있다. 그 이유는 물론 긴 시간 간극이 가져오는 망각이 제일 클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우리 못난 후손들이 그의 위대함을 발현시키지 못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배운 것은 당시 장보고대사의 세력이 강해지자 신라왕조 선비들이 그것을 맊고자 자객을 시켜 장보고를 살해하였다. 물론 전후사정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당시의 문신들은 자기들의 세력을 지키기위하여 장보고를 제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필생의 사업으로 이루어놓은 청해진을 폐쇄해 버린 것이다. 조선 땅에 어렵게 만들어 놓은 국제무역의 본거지를 없엠으로서 해상무역을 원천봉쇄한 것이다.
그리고 더 참담한 것은 장보고의 업적을 사실(史實)로서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장보고의 업적은 중국이나 일본문헌들에는 존재하고, 그것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원용하여 전하여지고 있다고 한다. 장보고대사의 업적은 훗날 일본의 엔닌(圓仁)대사의 일기를 통하여 전하여지고, 그것을 미국의 역사학자이며 당시 주일미국대사이었던 라이샤워의 책으로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 후손으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당시 우리의 선조들은 장보고대사의 업적을 역사로 남기지 않았을까? 왜 중국이나 일본 그것도 미국사람까지 훌륭한 해상왕으로 칭송하던 장보고 대사의 일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당시 중국인이 조선을 깔보는 동이(東夷)이었기 때문일까? 또 장보고가 미워 살해하면 되었지 왜 청해진을 폐쇄하여 해상무역의 본거지 조차 없에버린 것일까? 만일 청해진이 그대로 남았으면 훗날 누가 다시 해상무역을 시도하고, 제2의 장보고대사가 나오지 않았을까? 3면이 바다인 조선반도가 다시 바다문을 쳐닫은 신라시대 우리의 못난 선조의 모습을 우리는 본다.
그리고 다시 800년의 세월이 흘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왕조는 갈팡질팡이었다. 만일 이순신장군이 없었으면 과연 조선조는 지탱 될 수 있었을까? 그래서 풍전등화에서 왕조를 구한 조선선비들은 개과천선 국방에 목숨을 바쳤나? 아니다. 다시 당파싸움만 하며 세월을 다 보냈다.
그리고 다시 200년 세월이 흘러 1894년 전봉준의 난이 일어난다. 가렴주구에 빠진 지방토호에 맞선 전봉준은 동학난을 일으킨다. 불과 200년전 임진난을 치르고 난 이씨조선 문관들은 사색당파 싸움에 여념이 없던 차 전봉준의 난을 보고 어마뜨거워라 하고 청나라에 구원병을 청한다. 사실 현재의 전북지역에서 일어난 일종의 지방민중봉기 하나를 제어하지 못하고 그것도 외국에 원병을 청한 당시 조정의 우리 선조가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
불과 200년전 이순신장군의 살신보국의 충절은 후손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이를 계기로 왜군의 발호가 조선반도에서 일어나게 만들었다. 이것이 결국 청일전쟁의 단초가 되고 1905년 일본은 조선왕조를 찬탈 한다. 여기에 우리의 못난 선조의 모습이 있다.
만일 우리 선조들이 1200년전 장보고의 해상왕국을 지키려는 자세를 가졌었더라면 오늘날 우리 한반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 가정이야 없지만 장보고 이후 700년 800년 후 영국 불란서 독일 네델란드 스페인 포르트갈 등 많은 해양진출국가들이 중국대륙을 침탈하였다. 중국대륙을 마치 큰 소에 비유한단면, 이런 외세들은 소의 발, 꼬리, 다리, 허리 할 것없이 야금 야금 중국대륙을 먹어갔다.
그때에 중국의 산동반도에 조선의 무역기지가 있었다면 어떻했을까? 기록에의하면 당시 중국에 5만여에 달하는 외국인이 들어와 이있었다는데 그중 신라인들이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 독일인, 화란인들이 그렇게 쉽게 산동반도를 차지할 수 있었을까? 아니 신라인이 산동반도를 자기들 것으로 차지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임진난 이후 조선조 후기 선비들이 국력을 국방과 경제력에 나누어 힘을 길렀으면 조선이 그렇게 어이없게 무너졌을까? 200년도 안 되어 지방에서 봉기가 일어나자 우리 선조는 우선 외국에 그 진압을 부탁하는 못난 짓을 하고 나섰다.
또 그리고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다행이 오늘을 사는 우리는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 단군 이후 처음 맞은 이 경제적번영 앞에 우리 모두 뿌듯한 마음이다. 그러나 오늘이 오기까지 우리 모두는 많은 우여곡절과 어려움을 겪어왔다. 6.25 김일성남침, 절대빈곤, 경제개발계획추진, 민주화쟁취 이런 일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역사이다.
그렇다고 장보고 이후 우리 선조는 모두 못난 선조이고 오늘을 사는 우리는 잘난 후손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우리 선조들도 현재의 우리 못지 않게 훌륭한 선조였다. 다만 역사를 되짚어보면 이런 못난 면도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지금을 사는 우리의 못난 면은 또 얼마나 많을까?
무엇보다 현재 우리의 폐쇄성을 제기하고 싶다. 장보고 이후 보여준 신라인들의 폐쇄성이나, 이조 후기 우리선비들의 폐쇄성은 오늘 우리를 후회스럽게 한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는 어떤가? 지금은 개방이나 무역자유화가 우리에게 그리 큰 이슈가 아니다. 그러나 불과 30년 전 1970년대 후반 한국경제가 개방을 시작할 때 정치권은 말할 것 없고, 한국의 모든 언론들조차 개구일성 반대였다. 지금 한국을 대표하는 큰 신문들이 앞장서 당시 정부의 무역자유화나 섣부른 개방이 나라를 망친다고 비난하였다. 옛날 폐쇄성의 부활이다. 부존자원이라고는 사람밖에 없는 한반도가 그것도 북쪽은 막혀있어 3면밖에 없는 섬나라 같은 한국이 발전할 수 있는 길은 개방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신라의 장보고 때나 지금이 무엇이 다른가? 개방을 하려면 경쟁력을 길러야한다. 경쟁력은 기술개발이나 물가가 싸야 가능한데 그를 위한 안정화노력과정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얼마나 고초를 겪었나? 임금동결, 추곡수매가동결, 예산동결등 지옥같은 세월을 우리는 겪었다. 1970년대 말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반대세력 앞에 맨몸으로 칼 앞에 서야만 하였다. 그 시절이 없었으면 어떻게 한국이 기술개발이 되고, 재정이 건전하여지고, 물가가 안정되었겠나? 거저 찾아온 발전은 없다.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 앞에 놓인 장애는 두가지다. 그 하나가 정치권의 근대화다. 지금 우리가 보수. 진보하면서 억지로 편갈라 싸울땐가? 대통령을 잘 못 뽑으니 NLL이 있느니 없느니한다. 영토권을 포기하는 것도 대통령인가? 이 책임은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아직도 잔당들이 남아 기네 아니네 하지만, 지금 다 지나간 이슈가지고 패거리 싸움만 하는 것이 정치권이다. 구태고 폐쇄성이다.
MIT대학의 에이스모글루는 그의 최신 저서 'Why nations fail?'에서 나라의 패망역사는 개방이 아닌 붕당. 폐쇄성에서 찾았다. 지금같은 우리의 패거리 정치풍토는 조선시대의 사색당파싸움을 연상시킨다. 빨리 제거되어야 할구태이다.
다음은 아직도 역사의 저녁노을 구름 뒤에 숨어있는 것 같은 종북세력의 문제이다. 이념의 시대는 이미 지났고 한국의 종북세력도 이념보다는 단순이 북괴를 따르는 무리에 불과하고 그 수도 소수에 불과하다. 어느시대나 이런 세력들은 있게 마련이지만 이들은 어떻게하면 현재의 번영을 무너트릴 것인가를 꿈꾸고 있다. 우리 사회가 그들에 대하여 너무 너그럽거나, 무서워하는 것 같다. 이들도 하루빨리 자연스럽게 사회의 건전한세력으로 변화 흡수되어야 한다.
나는 장보고대사 앞에서 감히 역사발전의 흐름을 제기하고 싶다. 2차세계대전 후 세계는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나뉘었고, 후진국의 절대빈곤 퇴치와 경제개발에 노력하여 왔다. 자연스럽게 선진국을 중심으로 무역자유화가 화두가 되었고, 세계는 20세기 후반 작은 지구촌을 토대로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거대한 담론을 제기하였다. 세계화 앞에 소수의 개발도상국은 선진대열로 합류하기도 하였지만, 더 많은 수의 개발도상국들은 거대해진 세계경제 앞에 더 작아지는 모습으로 변하였다. 신자유주의를 토대로한 세계화경제운영은 급기야 선진국들 사이에서도 시장이 무너지고, 나라운영이 주저앉는 볼상사나운 모습을 자아내고 있다. 선진국의 치부가 드러난 모습이다.
제3차산업혁명을 주장하고 있는 제러미 리프킨같은 학자는 이제 세계경제는 세계화를 넘어 대륙화(continentalization)로 이행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끼리끼리 이해가 맞는 이웃과 공생하는 경제를 대륙화라고 한다면, 이것이 결국 장보고대사의 해상거점전략과 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장보고대사의 역사는 지금도 살아서 우리 후손의 길을 인도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오늘 우리 앞에 놓인 어려움이나 과제들이 비단 이것뿐이겠나? 그러나 이런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자연스럽게 정리되는 것이 역사이다. 다만 역사 앞에 그리고 장보고대사 앞에 우리는 못난 후손이 되지말아야 한다. 내 자신 좀더 일찍부터 한국경제의 발전동력을 교역의 확대 뿐만아니라 교역확대의 거점을 찾아 나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역시 나는 못난 후손인가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