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7일 토요일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판사의 말

   최근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기사가 언론에 등장하였다. 어느 재판과정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60대 중반의 여인이 요령부득한 증언을 하자 40대 중반의 판사가 하는 말 '늙으면 죽어야 해요'라고 했단다. 기가막힌 일이다.

   즉시 대법원장이 대 국민 사과를 했고, 지방법원장이 해당 판사를 견책하였다고 한다. 본인은 혼자말 한 것이 이렇게 되었다고 변명한 단다. 혼자 말이면 괜찮나? 관련하여 두가지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하나는 작년인가? 서울대 학생을 상대로 자기 부모가 얼마까지 살면 좋겠느냐는 여론조사를 하였단다. 그 결과는 63세인가가 평균치라고 한다. 결과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놀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금년인가 다시 조사한 결과는 그 연영이 조금 올라갔단다. 미안해서 조금 봐준 것인지 모르겠다.

   또 하나는 최근 세계를 상대로 노령층(Senior)에 대한 사회의 인식도를 외국  어느 조사기관이 한 결과가 나왔다. 상세한 내용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언론 보도에 의하면 한국이 세계 여러나라중 시니어에 대한 존경심이 가장 낮게 나온 나라 그룹에 속한단다.

   '동방예의지국'이니 효(孝)를 숭상하는 유교사상을 으뜸의 가치로 여기는 나라였던 한국 젊은이들의 가치관이 이 지경이니 정말 숨이 목까지 막혀온다. 그러니 40대 중반밖에 안 된다는 판사의 입에서 이런 말이던 푸념이던 나오는 것이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1970년대 말 일본 출신 유명 경제학자인 모리시마 미치오(런던대) 교수는 '일본경제가 왜 그렇게 빨리 성장하였나?'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 책의 기본 철학은 일본사회의 유교사상(Confucianism)이었다. 나보다는 나의 회사, 내 정부, 내 조국을 먼저 생각하는 일본인의 사상을 모리시마 교수는 유교사상에서 찾았다. 그런 전통과 의식이 오늘 일본을 선진국으로 만들고 경제대국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 모리시마 교수가 2000년대 일본으로 돌아와 쓴 책이 '일본경제는 왜 망할 수밖에 없나?'라는 정 반대 제목의 책을 썼다. 향락에 빠진 일본 젊은이들이 사회를 위한 자기의 기여나 희생을 찾을 수 없단다. 도전보다는 오늘의 향락에 몰두하는 일본 젊은이를 보는 노 교수의 눈은 아마도 처절했을 것이다.

   외국인의 눈에도 일본의 앞날은 잿빛으로 가득차 있다. 1960년대 70년대 한국의 경제관료들은 입만 열면 일본을 배우자, 대쳐영국수상의 정책을 배우자고 외쳐대고 다녔다. 그런 일본의 최근 돌아가는 모양새에 연민을 금할 수 없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처리과정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일본정부의 국가운영능력을 의심하게 되었다. 국내문제가 제대로 되지 않으니 일본정부는 국민의 관심을 국수애국에 돌리고자 한국과 독도 그리고 중국과 다도다오위 섬을 가지고 국제문제를 일으키고자 한다. 그런 일본정부 밑에 일본 젊은이들 마저 향락에 취해 유교적 희생과 근면을 저버리는 사회가 되었다면 일본이 망할 수밖에 없다는 모리시마 교수의 분석을 반박할 논거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2008년에 발간한 졸저 '번영의 조건(박영사)'에서 한국경제발전의 역사적 조건으로 한국의 '유교정신(Confucianism)을 분석한바 있다. 이에 따르면 한국사회의 유교문화는 '효(孝)'를 더 중시한 반면, 일본은 '충(忠)'을 기본가치로 한 유교문화라고 하였다.

   한국사회는 일제수탈과 6.25사변을 겪으면서 가난과 희망이 사그러든 사회로 변하였다. 절대빈곤이 인구의 3%를 차지하는 처절한 상황이었다. 이런 한국사회가 50년 사이에 이제 선진국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 밑바탕에는 지금도 살아 숨시고 있는 한국젊은이(당시)들의 나보다는 내 가족을 굶겨죽이지 않으려는 처절한 개발노력이 있었다. 그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마 한국에 없을 것이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는 말이 있다. 물을 마시면서 그 수원을 생각하라는 말이다. 누가 오늘 우리를 빈곤에서 번영을 가져오게 하였는지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젊은이들이 이렇게 모두 철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내 이야기는 옛날만 생각하자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미래를, 꿈을 이야기해야 한다. 오늘을 사는 한국의 시니어들이 젊은이 들로 부터 공치사를 듣자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오늘을 사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꿈을 펼치는 풍선의 끝 줄 한가닥이 땅에 매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끈이 떨어진 풍선은 어디로 날라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망발을 한 젊은 판사를 매도하고 싶지 않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어디 그사람 한사람 뿐이겠나? 그것은 우리 시니어의 교육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젊다한들 자기도 10년후면 '꼰대'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다. 판사가 재단하는 것은 죄에 대한 판결이지 그 인생을, 사회를 판결하는 직업이 아니다. 최근 판사던 검사던 정치권을 기웃대며 자기는 한없이 깨끗하고 남의 눈의 가시만 쳐다보는 법조인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건 가깝게는 우리 정치권이고, 넓게는 우리 사회 전체의 책임이다. 선진화를 향한 우리 수준이다.  아! 오늘을 사는 한국 늙인이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마라.































2012년 10월 18일 목요일

율사(律士)가 판치던 멕시코 정치

   1990년대 중반 멕시코 대통령 카를로스 살리나스(1988~1994)는 멕시코 경제의 구조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야심찬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자유시장경제를 표방하고, 미국 카나다 그리고 남미 대륙과의 개방협력을 추진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이 무렵 생겨난 것이 카나다와의 마지막 협상 타결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시작되었고, 미국과의 무역확대를 위하여 과감한 개방과 국영기업의 민영화정책을 살리나스는 추진하였다. 하바드 정치경제학박사 답게 시장개방을 중심으로 멕시코 경제를 한단계 업그레드 시킬려는 야심에 차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런 살리나스를 '예약된 실패'의 코너로 몰고 간 것은 살리나스 자신의 부패와 이를 응징하기 시작한 사회운동이었다. 살리나스와 그의 가족들은 많은 부패 혐의를 받게되었고 멕시코사회는 이를 정치사회문제화 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심에 살리나스의 북미자유무역협정이 문제제기의 구실노릇를 하였고, 이를 사회문제로 제기하는 데는 물론 법률가들이 앞장을 서게 되었다.

   멕시코가 미국 카나다와 FTA를 맺은지 20년의 세월이 흐른 현재의 멕시코경제가 과연 기대만큼 발전하였나? 물론 미국이나 세계를 향한 멕시코의 수출은 괄목할 신장을 하였다. 미국과의 상대적 저임을 바탕으로 한 멕시코의 산업단지는 수적인 면에서 많이 증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에 비하여 30%정도 뒤진 저임수준을  끌어올려 번영을 이루고자 한 멕시코경제는 기대만큼 미국을 따라잡지 못하였다. 오히려  지난 10여년간 멕시코 경제는 2~3% 대의 저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더구나 최근 멕시코에 비하여 더 저임금 수준인 중국시장이 개방되면서 많은 외국기업들은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하기 시작하였다. 산업단지에 겨울이 오기시작하였다. 임금개선에 따른 복지기대는 충족되지 못하고 있고, 그나마 소득의 발판이던 외국기업의 탈 멕시코 현상을 보면서 멕시코인들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다.

   불만으로 가득찬 멕시코 사회는 그 표적을 미국과의 FTA에서 찾고자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살리나스가 응징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를 앞장서 선동하고 행동에 옮기는 중심에는 자연스럽게 율사들이 등장하였다. 멕시코 정치의 중심에는 언제나 율사들이 판을 치고 있는데 율사들에게 살리나스의 개방정책과 부패는 고기가 물을 맞난 격이 되었다.

   대통령 임기를 겨우 맞친 살리나스는 1995년 어느날 뉴욕으로 야반도주를 하게 되고, 그 이후 아이랜드 등지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다. 최근 들어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살리나스는 멕시코를 드나들면서 권토중래를 시도하며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고 한다.

   한때 '세마리 용'으로 한국보다 오히려 우위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고, 1억이 넘는 인구와 많은 석유생산은 한국경제가 부러워하는 자원부국인 멕시코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2011년 11월 한국정부가 미국과 FTA를 타결하기위한 마지막 시도를 하고 있을 때 한국의 일부 지식인(?)들은 멕시코의 사례를 들어 나라를 거들내는 미국과의 FTA 반대를 외쳐대기 시작하였다. 거기에 더하여 살리나스 형제들의 부패협의에 비교하여 한국의 이명박대통령을 비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시시비비를 여기서 논하고자 하지 않는다. 다만 객관적인 사실을 가지고 몇가지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 멕시코경제가 NAFTA 때문에 망했나? 멕시코경제의 침하 원인 중에 NAFTA와 관련된  것이 일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수출증대를 통한 경기 부추김도 있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리먼사태 이후 소위 자유주의 그것도 미국이 좋아한다는 '신자유주의'가 경제운영 잘못의 중심에 서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정치경제학적 평가일 뿐이다. 마치 오늘날 유행병같은 '경제민주화', '정부규제확대'의 논의도 그가 갖는 정책의 정(正)의 효과 있는 반면, 다른 부작용이 얼마던지 있다는 것에는 반론이 없는 것과 같다. 더 나아가 오늘날 유행하는 자본주의 1,2,3,4,5가 사회발전의 흐름과 함께 강조점이 변화발전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거꾸로 멕시코가 살리나스 당시 FTA를 하지 않고 정부간섭 중심의 국수적 개발경제 운영(inward looking)을 하였다면 오늘 결과가 더 좋게 나왔을 것이라는 가정이 성립될 수 있을까? 결과를 놓고 이야기 한다면 아니다. 함께 출발한 카나다 경제는 오늘 오히려 미국을 추월할 것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미국과의 FTA 효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카나다의 FTA는 성공하고 멕시코의 FTA는 실패한 것일까?

   둘째 현재 멕시코경제가 더 어려워진 이유중 가장 큰 것은 정치 경제 사회 등 내부갈등에 기인 된 것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평가한다. 정파끼리의 싸움을 넘어 사회전체가 서로 못 잡아먹어 아웅다웅하는 동물세계처럼 되어가는 사회가 계속 발전을 해 갈 수는 없을 것이다. 부패와 마약 그리고 살상을 밥먹듯하는 사회를 상정하면 그 사회가 어떻게 바른 발전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더 루이스(Arther Lewis)교수가 말하는 소위 ' 경제하려는 의지(The will of economize)'가 없는데 어떻게 경제가 발전할 수 있나?

   한국의 요즘 정치현실을 생각해보자. 지금 한국의 대선정치판은 정책은 없고 서로 비난하고  떼 쓰고 서로 범법했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있다. 국회의원이랍시고 자기도 법률위반협의로 기소되어 있는 인사가 입만 열면 상대방의 범법행위를 맹비난하는 이 현실을 보면서 어떻게 한국경제가 올바른 발전과 번영를 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입만 열면 경제민주화, 복지를 외치는 그 인사들은 제대로 세금이나 내본 인사인지, 나라경제가 어떻게 운영되는 것인지 생각해본 일이나 있는지 의구심이 생긴다. 지금 한국경제가 이렇게 지리멸렬한 것은 한미 FTA를 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멕시코처럼 어떻게 하면 망하나 하는 짓만 골라하는 정치판에 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셋째 멕시코 경제가 어려워진 구조적 원인은 국제경쟁력이 떨어진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미국과의 FTA 이후 멕시코에는 자유화의 물결을 타고 많은 다국적기업들이 멕시코에 공장을 세우고 사업을 하였다. 그런 환경이 중국의 개방과 함께 경쟁력에서 뒤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많은 외국기업들은 멕시코를 떠나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하였고 이에따라 멕시코의 산업단지는 찬바람이 불어오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물론 경제자유화의 한 결과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유화는 오는 사람을 막지 말아야 하고 가는 사람을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가지 않게 하는 방법은 경쟁력을 살리는 길밖에 없다. 밤낮 갈등하면서 언제 경제의 경쟁력을 살려갈 수 있을까? 복지한다고 임금 올리고 기술개발은 뒷전인데 어떻게 경쟁력이 살아나나?

   한국도 마찬가지다. 경쟁력은 안정과 기술개발에서 찾아야 한다. 사회의 안정, 물가안정, 대외개방, 엄정한 법질서 유지, 이런 것들이 안정의 덕목이다. 기술개발은 밤낮 싸우면서 언제 연구실의 기술개발을 기대할 수 있나? 사회가 기술개발을 칭찬하고 지원하고 키우는 노력을 하지 않고 이공계대학만 가라 한다고 기술이 개발되나? 대기업만 때리고 있는데 이들이 언제 기술개발해서 경쟁력을 가추나? 멕시코의 오늘을 보면서 한국경제의 내일을 본다.

   넷째 율사들이 판을 치는 멕시코는 미래보다는 과거만 보는 우를 범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율사의 속성은 상대방의 미래보다는 과거에 보다 집착한다. 상대방이 과거 무슨 잘못을 하였나, 무슨 법이나 규정을 위반하였나, 이런 것만 생각하지 상대방이 지금까지의 발전을 토대로 미래 무엇을 어떻게 할지는 별로 관심이 없게 마련이다.살리나스는 집권 후는 말할 것 없고 재직시에도 허구헌날 율사들의 과거 들추기에 매몰되어 있었다고 당시 외신들은 전한다.

   한국을 보자. 왜 그렇게 많은 검사 판사 출신들이 현직이 끝나자마자 정치권을 기웃대는가? 오히려 정치권에 입문하기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하여 검찰청 법원에 근무하는 것 같다고 하면 너무 심한 매도일까? 물론 거의 대다수는 훌륭한 율사로서 길을 가고 있지만 최근 너무 많은 율사들이 청탁을 가리지 않고 정치권 여기저기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의 단기적 전문성은 무엇일까? 재직시 알게된 남의 어두운 면에 대한 정보일 것이다. 그들이 새 세상에서 단기적으로 기여하는 것은 남의 부정폭로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세상이 미래지향보다는 과거지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본인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아주 때 안묻은 척한다. 왜 일반관료들은 퇴직 후 일정기간동안 자기가 관여했던 업종에 가는 것을 제한하면서, 왜 율사들은 정치권에 가는 것을 제한하면 안 되나? 전직을 이용해 먹는 것은 일반관료나 율사가 무엇이 다른가?

    나는 한국 율사들의 고매한 인격과 직업의식을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회가 앞으로 가기 위해서는 과거의 광정(匡正)보다는 미래지향적으로 변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2012년 10월 2일 화요일

무속인까지 판치는 종편방송

   오늘 아침 어느 종편방송을 보며 하도 개탄스러워 글을 남기고자 한다. 정부가 작년인가 4대 신문에 종합방송 채널을 허용하고 방송에 들어간지 꽤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내 남직하고  종편방송에 채널을 돌리기 그리 쉽지 않다. 오랜 습관을 금세 고치기도 힘들고 어쩌다가 찾아보면 별 특별한 것도 없어 그럴 것이다. 시청률이 바닥이고 일반인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살고 있다.

   이런 종편방송이 선거철을 맞아 탈출구를 찾은듯 졸망졸망한 시사평론가들을 초대하여 년말로 닥아온 대통령 선거전망을 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방송에서 어느 인사를 초대하면 다른 종편에서는 비슷한 다른 인사를 초대하여 세상의 흐름이랍시고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대통령 후보군단의 일거수 일투족을 평가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네 시각으로는 그저 그런 인사들이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좀 돋보이기 위한 방법으로 토론의 내용보다는 그 외적인 것으로 즉 옷맵시, 말 스타일, 표정 등에서 승부를 걸고자 하는 모습이 벌어지고 있다. 커메디언 같기도 하고 개그맨 같기도 한 인사들의 거기가 거기인 토론을 보면서 저 사람들이 돈이 궁해서 이렇게 나와 그러나 하는 안쓰러운 생각도 든다. 그러다가 몇일 후 시사분석가라고  으시대던 인사들은 누구 캠프에 갔다, 누구의 장자방이 되었다고 뉴스를 탄다. 다른 나라도 이런 꼴이 있나?

   추석 연휴 자연 테레비 앞에 많이 앉아 있게 된 요즘 나는 어느 종편에서 어느 무속인을 출연시켜 대통령후보의 관상, 선거전망등을 이야기하게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다른 종편에서는 다른 인사를 초대하여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것도 출연인사의 소개를 어느학교 교수 아무개라고 하고 그 인사는 자기는 이것을 심오한 학문의 바탕위에서 나오는 소리임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하는 소리는 거의 다른 무속인과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나는 그분들의 직업이나 학문적 깊이를 폄회하려 하지 않는다. 사람은 각기 자기 인생관이 있기 때문이다. 또 자기 직업에 충실한 말을 얼마던지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공영방송에서 그것도 한국을 대표하는 큰 일간지가 대주주인 방송에서 한다는 데 문제를 제기한다.


   어느 종편에서는 대통령후보의 관상을 개인별로 하게 하고 즉 대통령 깜이냐 여부를 평가하게 한다. 누구는 머리를 너무 내려 이마가 잘 안보이니 연구에 보다 집중하는 것이 좋을 상이니, 누구는 눈빛이 너무 흐리다고 하고 그저 그런 시정잡배수준의 관상을 펼치고 있다. 더 한심한 것은 프로 진행자가 그 무속인에게 대통령후보가 남북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느냐? 김대중 전대통령의 햇볓정책이 좋은 것이냐 이명박대통령의 주는 것 만큼 받는다는 남북정책이 좋으냐고 구체적으로 물어보기도 한다.

   정말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무속인이 깊은 통찰력과 세상을 경세할 능력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이런 국가의 중요한 정책방향을 물어볼데가 없어 무속인을 불러놓고 토론하는 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육이오 전쟁 때 하도 답답하다보니 '정감록'이라는 책이 유행하여 '정도령'이 언제 어떻게 나타난다고 하는 이야기가 우리 어른들이 하는 것을 본일이 자꾸만 생각난다. 지금이 전쟁중 내일을 몰라 답답한 때인가?

   이런 혹세무민하는 방송을 도대체 21세기 글로벌시대에 대한민국에서 해야되나 하는 의구심이 아니들 수가 없다. 저런 방송을 종편이랍시고 인허가한 정부나 시청률 올린다고 이런 어처구니 없는 짓을 해대는 방송국이나 나는 도매금으로 비판하고 싶다. 전기가 부족하다는데 전기사용이 아까울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