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1일 화요일

'바보야! 그래도 성장이야'

   클린턴 미국대통령의 선거캠페인에 등장하였던 구호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가 자꾸 떠오르는 정치계절이다. 새누리당은 박근혜의원이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었고 민주당은 다음 달 말 쯤 후보 확정행사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가장 관심이 가는 안철수씨는 언제 어떤 형식을 타고  대통령후보로 공식 등판할지 아직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아무튼 안철수와 민주당 대통령후보와의 합종연행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 아니면 따로따로 독자행보를 하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따지고 보면 SNS시대 정당정치의 도그마를 깨보자고 달려드는 것 같은 안철수 행보는 좀 생경해 보이기도하고, 그러면서도 무언가 신선한 것 같기도하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새로움에 대한 설레임이 함께 교차하는 현상을 안철수씨를 통하여 본다. 정당이라는 전통의 틀 속에서 꼭 대통령은 만들어져야 하나? 국민후보, 시민후보 이런 이름으로 대통령이 될 수는 없는 것인가?

   '그밥에 그나물' 격인 새누리당이나 민주통합당의 꼴 갖지않은 인사들의 작태를 보면 오히려 틀이 없는 국민후보가 훨씬 신선미가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틀이 없으니 어떤모습으로 등단하느냐 하는 것이 첫째 문제로 등장한다. 현행 대통령선거의 틀은 모두 정당을 그 밑바닥으로 깔고 있기 때문에 그 틀 밖의 국민후보는 어떻게 선거를 치러가게 될지 잘 상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과문한 결과이겠지만 우선 국민후보는 기존 법률이나 제도로 보호되고 기속(羈束)되는 것에 잘 맞지 않을 같다. 선거자금의 지원이나 모든 선거법상의 지위를 얻어 활동하는데 한계가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내 돈가지고 내 능력대로 활동한다고 한다면 못 할 것도 없을 것 같다.

   기존정치의 프레임에서 본 안철수 현상의 두려움은 이런 오프라인선상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온라인선상의 두려움일 것이다. 그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를 어떻게든 한몸으로 엮어가고 싶어하는 것이 현재 민주통합당 인사들의 속내일텐데, 현 상태대로 어물어물 가다 어느날 '나는 문재인을 지지하오.' 또는 '손학규를 지지하오'하고 안철수가 대통령후보직을 사퇴할 때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혼란과 두려움이다. 그는 이미 그런 전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하고 싶어하던 서울시장을 내용이 무엇이었던 갑자기 박원순이라는 인사에게 넘겨주면서 자기의 환상적(?) 인기를  단수의 지지율에 불과하던 박원순에 덧 입혀줌으로써 서울시민은 무어가 무언지 잘 모르는 가운데 엉겹결에 박원순을 서울시장으로 맞이하게 된 황당한 일을 당하게 하였다.

   백보를 양보하여 서울시장은 그렇게 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대통령을 엉겹결에 맞이할 수는 없다. 대통령은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고, 국가를 보위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안철수현상을 지금 두려워하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이시점에서 안철수는 베일을 벋고 정정당당히 국민 앞에 서야 한다. 정치평론가들 중에는 안철수가 이미 대통령후보를 선언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하지만, 해석은 해석이고 현실적 실정법 앞에 책임있게 행동해야 한다. '안철수 생각'같은 연극같은 대사를 버리고 국민 앞에 알몸으로 서야한다. 그게 국민에대한 도리고 예의이다.

   8월 20일 새누리당은 박근헤 의원을 대통령후보로 선출하였다. 84%의 압도적 지지율로 당선되었다고 선전하지만 투표율이 40%도 안 되게 낮았던 점을 생각하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다시말해서 박근혜 지지할 사람 중심으로 투표가 이루어졌으니 득표율이야 올라갈 수밖에.

   그리고 박근혜의원은 대통령후보 수락연설을 했다. 연설에 등장한 새로운 단어는 '변화' '행복'이런 것들인 것 같다. 그러면서 박근혜는 ' 국민행복을 위한 새로운 제3의 변화'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다. 제3의 변화는 '경제민주화, 복지 그리고 일자리'를 통하여 실현하겠단다. 대개 기대했던 수준의 연설내용이었고, 구성에 고민이 묻어나는 후보로서의 첫번째 대 국민 멧세지였다. 그러나 속좁은 경제전문가의 입장에서는 많은 토를 달고 싶다.

   첫째 국민행복이라는 단어다. 우선 3인칭 국민이라는 단어에 추상적인 개념인 '행복'이라는 단어를 복합시켰다. 18세기 영국의 제러미 벤덤에의하여 제기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개념은 개인의 행복의 개념을 넘어 자유경제의 철학을 형성하게 하고, 이어진 제이 에스 밀과 같은 걸출한 경제철학자를 만들어 냈지만 개인의 행복과 공리(功利)는 상충개념으로 발전하였다. 오늘날 미국의 마이클 샌달에 의하여 현대경제에서 개인과 공리등이 구체적인 연구 테마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만큼 논의의 폭과 깊이가 넓고 깊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의 행복은 어떻게 형상화할까? 경제학에서 기피되는 단어가 행복(happiness)과 같은 추상적개념이다. 양심, 고통, 애국심 이런 개념은 객관적으로 계량화 형상화하기가 어렵다. 경제성장이나 물가, 1인당 소득, 소득분배 같은 용어들은 형상화할 수가 있다.

   대통령이 국민을 어떻게 행복하게 할 수 있나? 그저 많은 사람이 행복을 느낄것 같은 환경을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국민의 행복을 최대화하는 정책이 될 수는 없다. '행복을 느낄것 같은 환경'은  주관적인 개념이다. 또 이 과정에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의 행복은 무시되어도 되나 하고 센달은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의문은 계속 이어진다. 그래서 이런 단어의 사용을 퍼퓰리즘이라 한다.

   둘째 '제3의 변화'라는 이상한 단어를 사용하였다. '제3의 길' '제3의 물결'이런 말은 접해본 일이 있다. 알프레드 기든스의 제3의 길은 이미 퇴색된 개념이고, 최근 제3의 길은 없다고 까지 평가받기도 한다. 좋은 것만 찾아 떠나는 것 같은 개념의 제3의 길은 경제학에서는 없다. 공짜점심(free lunch box)이나 제3의길 같은 것이 국민의 행복과 상통하는 개념일지 모르겠다.

    다만 최근 영국의 토니 블레어수상이 들고 나와 다시 주목받게 된 개념이 제3의 길이라고 한 수 있다. 그러나 노동당정부 출신인 블레어 수상이 들고나온 제3의 길은 기든스의 제3의 길과는 다른 개념이다. 오히려 사회주의 성격의 노동당 정강정책에 시장경제를 접합시키고자 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박근혜후보가 이야기하는 제3의 변화를 여기에 대입한다면 거꾸로 시장경제에 사회주의 개념을 도입하고자 하는 기든스의 이론에 보다 접근된 것으로 이미 퇴색된 논리를 들고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알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은 한마디로 단층적 변화를 의미한다. 디지털시대 기존질서와 파라다임을 뛰어넘는 단층적변화를 토플러는 'The third wave'라고 하였다. 박근혜후보가 이야기하는 제3의 변화를 시현시킬 전략으로 내세운 경제민주화, 복지, 일자리창출이 단층적변화를 가져오게 할 수 있나? 아니다. 경제민주화던 복지던 일자리창출이던 모두 공짜점심도 아니고, 단층적변화의 개념이 아니다. 언어의 유희라면 실례일까?

   국민의 행복이나 제3의 변화나 정책을 수반하기 어려운 추상적 개념이고,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거론되기에는 너무 모호한 개념들이라는 점에서 안철수 원장의 '철수 생각'이나 박근혜 후보의 국민행복론이 다 거기가 거기인 것 같다.

   셋째 국가경영의 기본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국리민복'이다. 국리민복을 추상화하지 말고 보다 정책개념에서 접근해야 한다. 행복이라는 개념도 그런 의미로 쓰고자 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무엇보다 우선 '번영(繁榮)을 가져오는 정책을 구체화해야한다. 클린턴의 구호대로 문제는 경제적 번영이다.

   앞으로 다가올 가까운 미래는 지구인들을 어렵게 만들어 갈 것 같다. 리먼사태로부터 시작된 세계경제위기는 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실마리를 찾기 어렵다. EU를 비롯한 지구촌은 어디 활짝 웃는 곳을 지금 찾아볼 수 없다.

   한국경제 만 이야기하자. 수출이 어렵다. 경제성장이 제자리 걸음이다. 일자리가 늘지 않고 있다. 인구구조는 이미 고령화로 변해가고 있다. 정치권은 지도자 집단으로서 국민의 존경을 잃은지 오래다. 대통령은 잘했다는 말보다 '깜이 아니다'라는 야유를 받을 지경까지 인기를 잃고 있다. 세상은 그야말로 만인대 만인의 투쟁처럼 싸움 판이다. 대기업은 대기업대로, 자영업자는 자영업자대로, 가계는 가계대로 모두가 죽겠다고 야단이다. 고용은 늘어나지 않아 실업자 특히 젊은이들이 갈데가 없다. 일반국민은 어디 처다볼 데가 없다. 물론 세상을 이렇게만 보면 안 된다.


   그러나 그런 세상을 반영하듯 한국사회는 과거와 다른 변화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우선 돈이 없는 가계는 돈이 없어 소비를 못하고, 돈이 있는 가계는 장래가 불안해서 못쓰고 있다. 작년 2분기부터 가계의 소비성향이 줄어들고 있다. 가처분소득에대한 소비지출의 비율이 금년 2분기에 74.1%로 이 통계를 작성한 2003년 이후 최저수준이라고 한다. 가계가 지갑을 닫았다고 할 수 있다. 기업은 투자를 하지 않고 현금을 쌓아놓고 있단다. 이통에 기업의 부채비율이 100%이하로 내려갔다니 금석지감이 있다. 기업의 재무구조가 일시적으로 개선되는 것은 좋지만 투자를 하지 않으니 사업이 축소지향적일 수밖에 없고, 신규고용이 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정부는 정부대로 재정건전성 때문에 추경예산 편성같은 수요확장정책을 꺼리고 있다. 총수요가 늘 수 없는 환경이다.

   그러니 2012년 한국경제성장률 전망을 여려 기관에서 2% 대로 예측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게 무언가? 정부는 나름대로 다 어려운 판에 한국경제는 그래도 선방하고 있다고 이야기 하고 싶을 것이다. IMF 이후 한국경제는 저성장에 익숙해졌다. 좋게 보면 한국경제가 이미 성숙단계에 들어간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경제운영을 일선에서 오랫동안 맡아왔던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라면 아직 한국경제는 더 높은 성장세를 유지해야 한다. 오늘 이렇게 된 것은 경제성장기반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지금 한국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허물어저 가는 경제성장 동력을 다시 일으켜세우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5년전 한국인들은 이명박대통령이 이 일을 할 수 있는 경제대통령감이라고 판단하여 그를 압도적으로 지지하였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이다.

   사실 지금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는 국민의 안목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나라를 팔아먹는 종북주의가 득세하지 않는 한 박근헤던 안철수던 아니 민주당 누구던 사실 별 상관 없다. 대통령이 국가의 지도자이지만 백성의 삶을 책임지지 못한다면 현대국가에서 지도자 자격을 가졌다고 할 수 없다. 사탕발림으로 미운 놈 때리고 어려운 사람 사정 들어주겠다고, 그래서  말로만 국민의 행복을 책임지겠다고 선전해대는 것을 믿을 사람은 없다. 그런 20세기적 정치구호는 이제 한국사회에 먹혀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작년에 펴냈다는 '다시 일터로(Back to Work)'가 생각난다. 이제 다시 한국경제의 활력을 불어넣어 성장동력을 살려나가는 일이 어느 무엇보다 중요하다. 성장 잠재력을 다시 어떻게하면 끌어 올릴 수 있을 것인지 심각하게 생각하여야 한다. 불행히 이런 고민을 하는 정당이나 대통령후보는 지금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명박대통령의 '7-4-7'같은 정치구호를 반복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실사구시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번 대통령후보의 선거공약은 경제를 살리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다시 일터로'와 같은 한국경제 번영 전략이 나와야 한다. 그런 대통령후보를 내는 곳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정당이던 국민후보던 상관 없다. 나라를 팔아먹지 않는다면 흑묘(黑猫)던 백묘(白猫)던 무에 그리 대수인가?
 






















   

2012년 8월 13일 월요일

지는 해 와 뜨는 해

   런던의 올림픽이 8월 13일(한국시간) 새벽 폐막식과 함께 13일의 대 장정을 끝맞쳤다. 우려했던 테러등의 불상사가 없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보면서 한도시에서 3번이나 치러지는 초유의 행사지만 해가 지지않는 나라(?) 영국의 위상이 아직은 좀 남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올림픽 기간동안 한국인으로서 나는 행복을 느꼈다. 13개의 금메달과 세계 5위의 순위를 이룬 한국 팀의 능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아니 대단했다. 시합 하나 하나가 감동의 연출이지만 특히 그 많은 수의 금메달을 보면서 한국인인 나는 뿌듯했다. 미국 중국 영국 러시아 다음으로 한국이 금메달 수에서 5위를 차지하였다. 그 순위와 함께 사격 양궁 체조 등 전에는 기대하기 힘든 종목에서의 금메달은  더욱 뿌듯한 감동을 준다. 특히 양학서 체조선수의 승리 스토리는 나의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공교롭게 한일전으로 발전된 축구에서 일본을 통쾌하게 제압하고 동메달을 따는 순간 한국인들은 모두 얼싸안고 춤을 추었다. 모든 한국인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기에 충분한 이벤트들이었다.

   생각해보면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세계에서 다섯번째를 이루었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 뿌듯한 일이다. 물론 금메달 수로만 순위로 재단하지 말자는 것이 요즘의 추세지만 사실 우리 뒤로 있는 많은 선진국, 큰 나라들을 생각하게 된다. 독일 불란서 이태리 스페인 카나다 일본 등 그 많은 선진국들이 우리 뒤에 있다.

   올림픽의 발원지 그리스는 순위경쟁은 커녕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경제위기에 있다. 스페인 이태리의 신용등급이 날로 떨어지고 있더니, 이제 독일 네델란드 영국 등의 신용등급도 하향길로 들어서고 있다. '체력은 국력이다' 라는 말은 뒤집어 말하면 국력이 뒷밭침이 되어야 체력이 커지고 올림픽 같은 국제행사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최근 그리스사태에서 발생된 EU국들의의 경제위기는 그것 자체가 동정이 가는 이야기이지만 냉정하게 보면 그들 국가와 국민들 스스로 만들어낸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의 노력보다는 조상들이 이루어놓은 부(富)에 의존하여 절제를 모르는 이들 국가의 오늘과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원래 경제기반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불란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이웃시장이 침체되면서 자연 생산활동이 저조해지는 독일에 이르기까지 지금 유럽 경제는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유로체제에서 벗어난 영국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글로벌리더십 발휘에서도 한발 물러난 꼴이 되었다. 올림픽이 없었으면 영국은 더 빨리 신용등급의 하향길에 들어 섰을 것이다.

   최근의 세계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나는 서구 선진국들의 모습을 '지는 해'에 빗대어 생각하게 된다. 남 안 된 일에 초치는 나쁜 심사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멘토로 삼았던 선진,서구문명의 신화(myth)가 깨지는 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2차대전 이후 소위 후진국, 개발도상국들은 경제개발과 부흥을 위하여 나름대로 피나는 노력을 하여왔다. 경제계획이나 정책을 수립할 때 서구선진국들의 경험은 후참자들에게는 하나의 가르침이었고 선생님이었다. 특히 독일의 기술개발, 불란서의 정부역할 그리고 영국 그것도 대쳐정부의 지도력 이런 것들은 한국경제개발에 있어서 하나의 산 교과서였다.

   그런 나라들이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즉 수술을 하면서 그 속살을 보이게 되었다. 한국의 IMF 때 보다 자기들 끼리라고 훨씬 특혜성 지원을 보내는 IMF 등 국제기관 그리고 서구 국가들의 행동에 내심 속이 뒤틀리기도 하면서 그래도 잘 되기를 바랐지만 이들 국가의 대응능력은 영 아닌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멘토의 속살이 아닌, 아니 우리 속살 만도 못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신화가 깨지는 순간이다.

   올림픽 축구시합에서 한국이 영국과 4강진출을 준비할 때 영국축구감독은 '나는 한국 팀을 전연모른다' 라고 인터뷰하였다. 그말은 '내가 저 아래 수인 한국팀을 알 필요가 있느냐 즉  깜도 안되는 한국팀 쯤이야 '하는 오만한 속내을 들어 낸 것이다. 한국팀에 완패한 그의 얼굴이 보고 싶다. 역사상 처음 웨일스 아이랜드등  영국의 연합팀으로 구성하여 더욱 콧대가 높아진  영국팀이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의 단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에서도 그렇다. 21세기 한국의 경제위기 때 한국시장을 가지고 가장 악의적으로 놀았던 금융기관들이 주로 영국 불란서 독일계 은행들이었다. 그들의 뒤에는 Financial Times 등 구라파 언론기관들이 있었다. 그들의 눈에 발전성은 있지만 아직 작아 제맘대로 가지고 놀기에 말랑말랑한 한국경제가 하찮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내가 1980년대 초 경제기획국장으로 있을 때 영국경제를 따라잡을 수 있는 시기를 예측한 일이 있다. 결과는 당시 우리가 모수인 경제규모가 너무 적어 높은 성장률로만 따라잡는 시기를 예측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서 포기한 일이 있었다. 그게 한국경제의 실상이었다.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한국과 영국의 경제는 얼마나 격차가 나 있을까? 지금 다시 한국경제가 영국경제를 따라잡을 수 있는 시기를, 방법을 생각하면 옛날처럼 불가능한 일일까? 물론 현재의 대차대조표로는 한국경제가 영국을 , 독일을, 불란서를 당장 제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번 올림픽과 같은 역동성(varieties)을 경제에 불어넣는다면 영국의 축구처럼 될 수도 있지않을까 생각해본다.

   한국경제의 멘토였던 일본경제를 생각해 보자. 이제 30년이나 지난 '잃어버린 10년'을 지금도 되풀이하면서 일본경제는 어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벌써 3년이나 지났나. 후쿠시마원전의 쓰나미 피해 이후 일본인과 일본경제는 자신을 잃은 것 같다. 해마다 바뀌는 정권은 발전의 동력을 찾아 불어넣기에 역부족인 것 같다. 거기다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는 막연한 지진피해 망상은 시간이 갈 수록 커지는 분위기이다.

   세상도 변했다. 무결점 평균상승이 목표였던 대량생산시대는 지나갔다. 속도와 역동성의 시대에 맞는 경제리더십은 아직 일본경제에 찾기 힘들다. 초고령사회에서 안정이 우선인 일본 사회는 새로운 역동성을 심어가기에는 색이 바래버린 것 같다.

   러시아도 지는 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현대화 과정으로 이행하려던 고르바쵸프시대는 우여곡절 끝에 푸틴시대를 맞아 다시 독재체제인 구시대로의 회귀 전환된 것 같다. 그렇다고  러시아가 대전 이후 미국과 맞서 양극체제를 구가하던 시대로 돌아가기에는 축적된 국력이 이미 다 소진된 뒤라고 보인다. 옛날의 영화는 중국에게 물려주고, 구시대에 쓰던 아나로그 무기들이 여기저기 흐터져 있는 한낫 개발도상국으로 전락되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도 지는 해일까? 여기에는 여러 접근이 최근 나오고 있다. 미국도 이미 대전 이후 50여년 동안 이루어졌던 세계에 대한 절대적 지도력은 상실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경제적인 지도력의 한계는 달러의 기축통화지위 조차 흔들리게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대량생산중심의 아나로그시대를 마감한 현재, 디지털시대에 미국을 능가할 경제적역동성을 가진 나라는 아직 등장하지 않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일본은 초고령사회로 역동성이 없고, 인도는 비교 되기에는 아직 너무 뒤져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21세기 디지털경제를 이끌 리더십은 미국을 제외하고 아직 찾기 힘든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국은 아직 중천에 있는 해라고 평가하는 조지 프리드만의 평가에 손을 들어야 할 것 같다.

   중국은 어떤가? 뜨는 해인가 지는 해인가? 최근에 발전이 시작되어 그 엄청난 크기 때문에 단숨에 미국의 맞상대가 되었으니 뜨는 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러나 근육과 골격이 아직 다져지지 않은채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중국경제는 언제 바람이 빠질지, 골격이 무너질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디지털로의 이행이 느린 그런 모습은 아니다. 그리고 일단 세계의 굴뚝, 세계의 소비를 좌우할 엄청난 크기의 힘이 있다. 이 모습은 해가 뜨기는 떴는데 일찍 폭풍우에 가려 해가 떠오르는지, 이미 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한국경제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답해야 한다. 한국경제는 일본경제처럼 아나로그적 무결점경제 행태라고 할 수는 없다.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 보여주었던처럼 오히려 디지털경제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가진 경제가 현재의 한국경제라고 할 수 있다. 성격상 무결점을 지향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보다 역동적으로 다양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한국경제의 오늘과 내일의 희망섞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뜨는 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런 한국경제의 역동성이 거저 정(正)의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역동성은 성격상 실패의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어떻게 하면 이 역동성을  성공으로 연계시킬 것인가는 오늘을 사는 한국사람들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유시장경제질서를 제대로 지켜나가는 지혜와 용기가 있어야 한다. 허울 좋은 '경제민주화'를 토대로 사탕발림식 복지를 내 세우는 것은 오늘의 그리스를 닮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치열한 경쟁과 다양성을 추구하는 사회를 만들도록 해야 한다. 여야를 막론하고 한국정치권이 내 세우는 혹세무민의 인기영합주의적 정책구호에 반대로 가야 한다. 인기영합을 배척하고 원론적 자유경쟁체제를 배양해 가야 한다. 피나는 노력만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보장 받는 것처럼 말이다.






























2012년 8월 8일 수요일

자유시장경제질서와 사회적시장경제질서

   대한민국 헌법은 23조에서 국민의 재산권을 보장하고, 119조 1항에서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나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하는 '자유시장경제질서'를 천명하였다. 동시에 헌법 23조 2항과 119조 2항은 재산권의 행사나, 자유시장경제질서에서 권리행사의 한계를 제시하였다. 즉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 하는 사회적 구속성의 원리를, 자유시장경제의 유지에서도 국가적 규제와 조정을 정당화하는 사회성의 원리를 토대로 한 사회적시장경제질서(헌법재판소, 성낙인서울대교수)를 천명하였다.

   여기서 거론되는 자유시장경제질서와 사회적시장경제질서는 상충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상호독립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시장경제질서의 본질이 자유경쟁의 원리를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재산권의 행사제한이나 시장질서 유지에 국가의 규제와 조정을 정당화하는 질서의 사회성을 동시에 천명하였다고 할 수 있다.

   상호보완적이라기 보다는 시장경제질서의 원활한 발전을 도모하는 독립된 개념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개념적으로는 자유시장경제질서가 주(主)의 개념이라면 경제질서의 사회성은 종(從)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주와 종의 관계가 서로 상충될 때 어느것이 다른 것을 우선하기보다는 상호영역을 지키면서 상대방을 존중하는 관계임을 헌법재판소는 판시하였다. (헌법재판소 2006 헌바: 기본권침해를 정당화할 수 있는 모든 공익을 아울러 고려하여 법률의 합헌성 여부를 심사하여야 한다)

   헌법 119조의 2항은 자유시장경제원리에서 보면 많은 문제를 스스로 안고 있다. 자유경제에 대한 예외를 인정하기 위하여 보다 구체적인 조건을 적시하는 듯한 제 2항의 문구는 요즘의 시각에서보면 해석상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그것이 제1항과 어떤관계를 가지고 운용되어야 하는지가 불분명하다. 개념적 주와 종의 관계라기보다는 상호독립적이다. 그러니 서로 상충될 때 해법은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이에대한 법률적시비는 본고의 영역이 아니다.

   작금 한국사회에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소위 '경제민주화', '보편적복지' 등의 정치담론들이 다 헌법 119조 2항의 법률적개념에 토대를 두고 시작되어 사회체제 전체를 넘나드는 이념적담론으로까지 발전되어가고 있다. 논의의 한계를 살펴보고 그리고 해법을 찾아보는 순서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우선 논의의 본원지라 할 수 있는 헌법 제 119조를 그대로 옮겨보자. 1항은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는 자유시장경제질서의 기본철학이다. 그리고 2항은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로 되어 있다. 1항에대한 한계랄까 예외를 이야기할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보다 구체적인 경우를 적시하기위하여 말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1987년 만들어진 헌법조문이니 요즘 개념으로 보면 진부한 표현들이지만 지금 그것을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이 조항을 대표하여 소위 경제민주화가 정치담론으로 나오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경제민주화의 개념이 확대되어 '사회적공평성'으로 발전되었다. 무엇이 사회적 공평성을 저해하는가? 경제력 격차다. 그 경제력 격차의 중심에는 대기업, 재벌이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사회적평등성'으로 가다보니 복지가 누구에게나 같은 내용의 행복을 보장받는 평등성으로 발전하여 '보편적복지'가 정치담론으로 발전되었다.

   여기서 제기되는 첫번째 문제가 주(主)와 종(從)을 어떻게 개념화해야 할까 하는 것이다.  경제민주화로 대표되는 119조 2항은 자유시장질서를 천명한 119조 1항의 예외 내지는 한계에 속하는 종의 개념에 속한다. 따라서 경제민주화를 강조하여 자유시장질서를 기본적으로 망가트릴 수는 없는 경제민주화의 한계를 우선 인식해야 한다. 경제민주화를 위하여 재벌을 해체하고, 응징하고, 경제활동을 직접 제한하는 그런 행위는 할 수 없다는 논거가 여기에 있다.  총액출자제한이나 순환출자금지 또는 주권행사의 제한을 법률로 제한하는 데는 이런 한계가 있다. 헌법 119조의 1항(주) 과 2항(종)이 주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해결책은 없는 것인가? 포괄적이기는 하지만 공정거래법상의 불공정거래행위 제한 제도의 운용을 보다 확대하고 탄력적으로 하여 문제해결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재벌응징의 타당성 논거인 계열기업이나 중소거래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불공정 부당행위는 공정거래법의 운용을 보다 엄격하게 집행함으로써 많이 해결될 수 있다. 순환출자나 주권행사의 제한을 법률의 제정이나 개정을 통하여 이루려 하기보다는 앞에 이야기한 불공정거래행위 제한을 보다 엄격하게 적용하거나, 그것도 부족하다고 인식될 경우  주거래은행제도를 통하여 금융정책에 입각한 규제를 부활하는 것이 오히려 현재 정치권에서 추진하는 법률적제재보다는 낫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외국의 예에서 보거나 우리 헌법119조의 해석으로 보나 자유시장경제질서를 지키면서 대기업들의 부작용을 치유하는 길이 될 것이다.

   물론 이정도의 제도적 장치로는 부족하다. 원천적으로 재벌 내지 대기업 오너의 의식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말처럼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1인독재, 영구집권을 정치에서 금기하는 것이 예상되는 독재 폐해 때문이다. 그러나 기업활동은 이것이 불가능하다. 결국 오너의 의식전환이 필요한 대목이다. 한국재벌 오너들의 권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임기가 없는 그들의 눈에 정치권이나 언론들이, 아니 대통령인들 무섭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그런 딕테이터십은 없을 것 같은 내부통제 앞에 새로운 파라다임의 전환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일지 모른다.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문제와 관련하여 3가지 해법을 제안해 보고자 한다.

   첫째 재벌 오너들은 법률상 기업지배구조가 터무니없는 불공정거래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이건희 삼성회장이 우호지분을 합하여도 불과 17%의 지분을 가지고 삼성그룹 전체를 지배한다고 한다. 이것은 오히려 낳은 편으로 불과 5%내외의 지분을 가지고 기업을 지배하고 있는 재벌오너의 지배구조를 공정거래 차원에서 오너 스스로 문제인식을 가져야 한다. 계열기업이 없는 중소기업의 오너가 경영권 확보를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하는 것을 역지사지해야 한다. 순환출자가 현실적으로 불가피함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작은 비율의 주식분포 만 가지고 전횡의 권력울 행사하는 현실 앞에 재벌의 오너는 겸손해져야 한다.

   둘째 재벌의 탐욕성(greediness)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다. 재벌의 오너가 갑자기 성인군자가 되라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재벌의 내부경영구조가 이익이 있는한 시장 참여는 확대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골목상권의 침탈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두가지를 생각해보자. 소위 끝없는 재벌의 시장참여확대 종착역은 어디일까? 재벌과 비재벌의 투쟁으로 가게 된다. 누가 이기나? 처음은 재벌이 이기겠지만 종국적으로는 재벌이 망하게 된다.

   명색이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의 딸들이 루이비통등 명품장사를 그 아버지의 경제권력으로 휘어잡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이뿐이랴. 재벌이 아이스케이키 장사를 하고, 식당을 하고, 커피전문점을 하고.....이런 무분별한 시장확장이 재벌이 아닌 나머지 시장들은 어떻게 받아드리게 되나? 이 길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계열기업의 납품을 계약서도 써주지 않고 받아놓고, 자기들 형편에 맞는 시기에 자기들 입에 맞는 가격으로 일방적으로 정하여 대금을 정산하는 대기업의 횡포는 얼마나 갈까? 그 종착역은 어디일까? 결국 대기업의 탐욕은 시장을 망가트리고 국민경제를 쇠퇴시킨다.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새로운 시장의 세력 앞에 재벌 자체가 파멸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탐욕의 문제를 기업 오너들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일본의 경우 기업가들 사이에 사업의 영역(나와바리)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아무리 내가 힘이 있어도 자기에게 가당치 않은 영역은 범접을 금한다고 한다. 경제학적으로야 그만큰 도전(challenge)이 적다고 할 수 있지만, 다른면에서는 전문성과 집중이 가능하게 되는 경영형태라고 할 것이다. 그보다는 대기업 횡포라는 문제의 자연스러운 해결책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셋째 재벌의 윤리성(virtue)의 문제를 성낙인 서울대 교수는 제기한다. 가진자의 사회에 대한 자비(mercy)가 아니라 도덕성 윤리성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한다. 대기업 오너들이 변칙상속을 위하여 불법 내지 법의 일탈행위를 한다던가, 자식에게 부와 함께 경영권을 물려주기 위하여 변칙적인 행위를 하는 것을 사회가 엄격하게 응징하여야 한다. 돈을 바탕으로 일반인보다 특별대우를 받는 행위는 도덕 윤리성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현재 한국경제에서 소위 재벌총수라 불리우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자기 선대로부터 부와 경영권을 함께 물려받은 사람들이다. 경쟁의 원리에서 원천적으로 일탈된 이들이 올림픽이다 무어다 해서 체육계 등에 지원을 맡았다 해서 그게 윤리성 부합여부의 논의를 희석시킬 수 있는 일은 못 될 것이다. 고용을 늘리고 수출을 늘리고 부가가치를 높이는 이런 경제활동은 물론 평가받아야 할 덕목이지만, 만일 그 뒤에 감추어진 계열기업에 대한 착취나 불공정행위를 하였다면 아무리 앞의 일이 칭찬받을 만한 것이라도 그런 재벌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윤리도덕면에서 그들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상에서 자유시장경제질서를 보완하는 사회적시장경제질서의 확립을 위한 법률적, 논리적 해법을 찾아 논의하여 보았지만 결과는 오히려 어떤면에서는 혼란스런 이야기만 된것 같기도 하다. 그만큼 현실적 해법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은 오히려 경제민주화의 모호성를 딛고 보편적 복지문제로 확대 승화된다.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완할 의무를 진다'라고 하여 개인의 행복추구권이 헌법상의 권리임을 명시하였다. 보편적 복지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여기에 제한적 개념이 선별적복지로 해석될 수 있다. 전자가 총괄주의(universal ism)라면 후자가 선별주의 (selective base)이다.

   보편적 복지는 국민의 행복추구권에 입각하여 국민 누구나 복지를 향유할 권리를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논거가 된다. 여기에 수반되는 재원 확보를 위하여 부자증세에서 재벌해체에 이르기까지 넓은 정책제시가 넘나든다. 이것이 더 나아가 행복보장의 평등성으로 사회주의 실현의 장느까지 확대될 수도 있다. 선별적 복지는 재원확충의 현실적 제약을 전제로 한다. 영유아 지원, 초중등학교의 급식비 지원등이 여기에 속하는 정책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개념적 분류는 사실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국가는 국민의 행복추구를 뒷밭침해야 할 무한책임이 있다. 그렇다고 능력이 따르지 않는데 무턱대고 한없이 복지만 추구할 수는 없다. 따라서 선벽적복지는 보편적복지의 현실적 능력의 한계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보편주의 바탕위에 선별적 원리가 결합된 '선별적 보편주의(selective universal ism)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런 당연한 복지정책이 왜 이렇게 심각한 정치담론으로 승격되었는가? 여기에는 정치권의 인기영합주의(populism)가 문제가 된다.  사탕발림처럼 시작된 복지논쟁은 만인평등의 복지로까지 번져나가게 된다. 복지평등은 사회평등을 지향하여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이념화하기까지 한다.

   1980년대까지 개발이론에서 근간이 되었던 소득분배정책(income distribution policy)은 이제 빛을 잃은 것 같다. 1차적 소득분배정책은 소득원을 함양하는 정책이론으로 교육, 보건, 주택, 직업훈련등이 기본이 되었다. 앞으로 닥아올 다음세대에게 부를 이룰 수 있는 원천(소득원)을 함양하자는 이론이다. 그리고 2차적 소득분배정책이 조세나 재정을 통한 소득이전을 추구하자는 정책이다. 이는 경쟁실패자, 노약자 등 사회부조가 필요한 계층에 대한 정부지원을 확대하자는 이론이다. 1990년대까지 한국경제정책의 기본은 바로 이 소득분배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경제가 이런 소득분배정책을 이제 폐기할 단계에 와 있는가? 아니다. 아직도 1차적 소득분배정책이 가장 시급한 과제로 제기되는 단계에 있다. 소득원을 함양하기 위하여 교육, 보건, 주택등 확대되어야 할 정책분야가 한없이 많다. 조세를 통한 소득의 2차적분배나 재정지원도 확대 발전되어야 할 정책분야이다.

   이런 경제정책의 기본은 다 없어지고 오로지 나누어먹기식 복지정책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정치권으로부터 만들어진 폐해라고 할 것이다. 선심성 복지정책에의 매몰은 한국경제를 원천적으로 망가트리는 우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 우선 능력 밖의 복지수준 확대는 한국경제의 잠재성장력을 괴멸시킬수 있다. 더 나아가 남의 것을 뺏어먹기에 매몰된 국민의 종착역은 어디겠는가? 결과의 평등 만을 지향하는 사회는  경쟁의 동기를 잃게 되어 파멸되게 된다.

    이런 무서운 결과를 의식하지 않은채 지금 한국의 보수 진보, 여야를 막론하고 보편적복지의 포퓨릴즘에 빠져 있는 형국이다. 한국경제가 오늘 이만큼 된 원인을 살펴보고 한번 더 도약할 것을 꿈꾸는 정치인이 나와야 한다. 그런사람이 국가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의 자세가 필요한 오늘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사회에 밀물처럼 몰려온 경제민주화, 보편적복지 담론은 정치권의 인기주의의 구실이 아닌 한국경제가 지향하고 추구해야 할  원천적 과제이다. 이것은 정치에 이용 되는 얕은 꾀의 대상이 아니다. 항차 사회파멸의 음흉한 전략의 대상으로 접근되어서는 더더욱 안 될일이다. 또한 이 일을 이지경으로 만든 책임이 정치권에만 있다고 할 수 만 없다. 문제의 원천제공자라고 할 수 있는 기업, 대기업,재벌 그리고 놀고 공짜도시락만 거저 먹으려는 계층 모두가 자성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자유시장경제질서와 사회적시장경제질서를 함께 지키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