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9일 화요일

나라 기강을 세워야 한다.

   최근 너무 답답한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한미 FTA 국회비준과정에서 본회의장에 체루탄을 터트린 몰지각한 국회의원이 있어 우리 모두를 세계에 부끄럽게 하였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오늘까지 국회의장은 국회건물에 대한 최루탄 폭팔을 고발도 하지 않고 있다. 시민단체가 고발하여 검찰에서 조사는 시작한 모양이지만 자기 집에 폭탄을 터트리는데도 주인인 국회의장은 사직당국에 고발도 하지 못하고 눈치보는 참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일요일 한미 FTA반대 시위과정에서 종로경찰서장이 시위자들로부터 린치를 당하였다. 현직 관활경찰서장이 데모대에 의해 얻어 맞고 봉변을 당하는 일이 서울 그것도 세종로 네거리에서 일어났다. 부끄럽고 부끄럽다. 공권력이 시위대에 무너진 것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말한마디 안하고 앉아 있다가 어저께 겨우 한마디 하였다. 이것은 대대적인 소탕과 엄벌에 처해야 한다. 시위대 말대로 경찰서장이 폭력을 자초하였다고 괴변을 털어놓고 있지만 어떤 경우라도 공권력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있으면 그것은 법치가 아니다. 나라가 아니다.

   한미 FTA 비준을 날치기로 통과시킨 한나라당 응징과 원인무효를 주장하기 위하여 장외투쟁을 선언한 민주당 국회의원 들은 내년 예산심의를 거부하고 있다. 법정시한을 3일 앞둔 현재까지 민주당은 국회등원을 거부하고 있고, 한나라당과 다른 정당은 민주당을 기다리기 위하여 예결위심의를 보류하고 있다. 이것은 말도 안 된다. 한나라당과 다른 당은 당장 예산 심의를 시작하여 최단시일 내에 국회를  통과시켜야 한다.

   경제가 어려운 판에 내년 사업을 효율적으로 시작하도록 정부 국회 모두 책임을 져야 한다. 자기네 마음에 들지않는 FTA를 국회가 통과시켰다고 국회에 들어오지 않겠다면 그리 하라고 해야한다. 국회가 민주당 만의 국회가 아니고 국민 대다수가 찬성하는 법안을 소수당인 자기들이 마음에 안 든다고 떼를 쓰면 민주주의을 하자는 이야기인가? 그리고  등원하지 않는 민주당 국회의원 들의 세비는 그만큼 삭감해야 마땅하다. 무노동 무임금이 당연히 국회의원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일반 근로자에게는 무노동무임금 원칙이 적용되고, 정당활동을 국회의원의 근로책임과 착각하는 사고 자체가 전근대적인 행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저께(11월 28일) 정부와 한나라당은 무기한계약직제를 실시한다고 호기있게 발표하였다. 비정규직 공공근로자들의 형편을 고려한 정책이라고 하였다. 일견 동정이 가는 정책이지만 이것도 해괘하기는 앞의 사례들이나 다를 것이 별로 없다. 무기한계약직과 정규직과는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봉급수준에서 차이가 있고, 다른 근로조건 즉 복리후생등에서 차이가 나는지는 모르겠다. 무기한계약이라면 계약의 영속성에서 정규직과 차이가 없고, 복리후생에서 차이가 없으면 또한 정규직과 차이가 없을 것이다. 다만 현 봉급수준만 차이가 난다면 오히려 이것을 정규직으로 하고 봉급수준도 현재 비정규직이 받는 수준으로 낮추어 시행하면 되는 것이지 어정쩡하게 중간지대를 새로 만드는 복리정책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게 될 때 지금 전체 공공직중 무기한계약직으로 전환되는 것이 20여퍼센트라고 하는데 나머지 안 된 사람들도 당연히 무기한 계약직으로 전환되어야 하지 않겠나? 어정쩡한 사각지대의 탄생에 따른 정책의 경직성이 문제로 등장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정부와 한나라당이 급조한 퍼퓰리즘 졸속행정이라고 평가된다.

   내년 세계경제전망은 매우 어둡다. 얼마나 어렵고 답답하면 미국은 연말세일의 시작인 Black Friday의 백화점 매출이 좋다고 증시가 오르고, 구라파는 이태리 부실처리에 대한 IMF 등 국제기관이 나설가능성이 있다고 불란서, 독일, 영국 등 증시가 오르고 있다. 얼마나 개선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면 개선근처에 가지도 않았는데 냄새만 맡고도 반응하는 꼴이 아닌가?

   변동성으로 말하면 한국경제가 훨씬 취약한데 거기에 죽기로 매달려도 부족한 판국에 지금 한국에서는 집단이기에 너나 할 것 없이 매달린 꼴이다. 내년에 국회의원만 되면, 내년에 대통령만 되면, 내년에 집권당만 되면, 준비없이 사탕발림으로 집권세력만 되면.... 이런 모양이 현재의 한국의 모습이다.

   '대통령이 보이지 않는다, 정부의 대응이 보이지 않는다, 국회는 있는 것 보다 없는 것이 더  나을 성 싶다, 좌파다우파다하는  이념전쟁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 잘난 경제학자들은 다 어디 갔나?' 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이나라 지도자(?) 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2011년 11월 24일 목요일

FTA 시대를 새로운 이념의 시대로 만들자

'이념의 시대은 끝났다'고 4년전 이명박대통령 당선자는 외쳤다. 그리고 그의 임기 마지막 연도가 다 되어가는 오늘 과연 이념의 시대는 끝났는가? 아니다, 아니면 모르겠다, 중 답이 있을 것 같다.

이념이 무슨 뜻인가? 사전에 의하면 '이성의 판단으로 얻은 최고의 개념'이라 쓰여 있다. 이 대답도 알쏭달쏭하다. 이념이라는 단어에 좌파 우파를 붙이게 된 연유가 불란서 의회 회의장 좌석에서 좌측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급진적이어서 이들을 좌파로, 그리고 보다 보수적인 우측 좌석 인사들을 우파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역사 이야기이다. 보수의 반대개념이 진보가 되니까 급진적인 무리를 진보좌파라 부르게 된 연유가 되었다.

진보(progressism)라는 개념을 정책의 개념으로 쓸 때 개혁이라고 한다. 개혁은 다시 현실의 토대위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것을 reform이라고 하고, 현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고자 할때 이를 revolution이라 부른다. 한국적 현실에서 출발된 진보좌파는 사회주의 더 나아가 북한공산주의로 이해되기도 한다.

한국의 진보좌파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북한공산주의, 종북좌파 등으로 개념규정 되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리의 행동양식에 따라 이런 부류 어디엔가로 분류될 수 있다는데 큰 이의가 없을 것이다. 보수우파는 현실유지(Status quo) 내지 점진적 개선(Improvement, reform)을 선호하는 무리들이라고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후자의 경우는 어느시대 어느경우 든 존재하는 현실 무리를 말하지만, 진보좌파는 성격상 그 존재가 보다 확연하고 보다 존재가 선명하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수와 진보의 현실적 논쟁이 지속되고 충돌하는 현실을 우리는 이념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중에서도 진보의 목소리가 커지고 자기 이익 추구만을 위하여 언동이 과격할 때 일반적으로 이념의 시대라고 부른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개념규정 범주 속에서 오늘 한국 사회를 재단할 때 이념의 시대는 과연 끝났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보좌파의 목소리와 행동은 지금도 한국사회에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기 무리의 이익만을 위하여 소리지르고 행동하는 양상이 더욱 확대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현상이 이번 한미 FTA 국회비준과정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소위 진보좌파 세력들이 집권하였던 노무현 전대통령 재임시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내세우며 홍보하던 한미FTA를 이명박정부가 들어와서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이를 결사반대하는 자세를 보인 것은 집단이기와 급진이념의 발로로 볼수밖에 없다. ISD 규정도 자기들 할 때는 아무 문제 없다가 이명박정부 들어와서는 결사반대한 것이다. 그때는 몰랐다는 변명은 국가운영자의 자세가 아니다. 한미 FTA가 한국의 주권을 미국에 넘겨주는 을사늑약과 같은 것이라고 어거지 쓰는 인사는 몇달 전 왜 한 EU FTA 때는 가만이 있었나? 경제협력을 하자는 경제협정이 주권과 어떻게 관계가 있나? 그런 인사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찔하지 않을 수 없다. 무슨 이유에서던 삼권(三權)중 한 축을 담당하는 국회의사당에 체루탄을 터트리는 자세는 급진을 떠나 범죄이고 그 무리를 빼 놓은 절대다수의 한국인들이 한국인임을 잠시 부끄럽게 만드는 처신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좌파는 이미 그 존재를 여러번 들어내 놓았다. 쇠고기파동때 촛불시위하던 그 무리들은, 미국 쇠고기 먹으면 죽는다고 철부지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그런 인사들은 그동안 미국 쇠고기 먹고 잘만 살고 있지 않나? 이상한 인사 하나가 남의 회사에 들어가 불법시위하는데 '희망버스'라는 이름으로 집단 시위하던 그 인사들은 천안함에서 희생된, 연평도 폭침에서 나라위해 몸바친 인사들에게 희망버스라는 찬란한 이름이 아니더라도 시내버스라도 타고 가 나를 지켜줘 고맙다고 머리 숙여본 적이 있는가? 종북세력들은 최근 전파를 타고 들려오는 북한의 실상과 북한국민들의 불만 가득한 저 절규를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단 말인가? 이것이 최근 한국의 진보좌파 진영의 실상이다. 민주당은 민주주의 정당이기를 포기한채 민노당 등 사회주의 그룹과의 합종연행만 오매불망 추구하고 있는 모습이다.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에 큰 기여을 했다는 20, 30,40 세대가 진보좌파라고 착각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는 시간이 가면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념의 시대는 끝이 난 것이 아니지 않은가? 불구하고 나는 이념의 시대는 지났다고 평가한다. 한국사회에서 진보좌파가 아직 상당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서리 지난 끝무렵 배추에 불과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 세상은 이념이 아닌 복지 행복이 중심가치가 된 세상이 되었다. 그것은 경제적 번영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물론 번영이 행복의 충분조건은 되지 못하지만 선결의 필요조건임은 틀림없다. 어느나라에 지금 이념적 지배가 우선하는가? 김정일이 지배하는 북한을 빼고는 세계에 없다. 어떻게 하면 국민을 잘 살게 하고 복지가 풍부하고 행복하게 만들까? 이것이 현대국가의 운영전략이다. 과거의 좌 우이념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북한의 대남 위협도 과거와는 다른 차원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도 서리 맞은 배추잎 꼴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이미 서리를 맞아 다시 푸르름을 안고 일어나기에는 철이 지났다. 백성의 행복은 고사하고 먹이지 못하면서 핵무기를 가진들 대승적으로 보면 장기적으로 무슨 그리 큰 위협이 되겠는가 하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자 이제 우여곡절을 거쳐 한미 FTA가 국회인준을 받았고 시행에 들어가게 되었다. 경쟁을 하는데 왜 어려움이 없겠나? 왜 우리에게 불리한 부문이 없겠나? 그러나 그런 것을 극복하고 이기는 것이 경쟁시대의 국가의 진운이다. 이미 우리나라는 구매력기준으로 일인당 소득이 EU국가 평균을 앞질렀다. 세계를 다녀보면 한국의 발전상에 우리 스스로 놀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고 우리의 앞날이 보장된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하기에 달렸다. 그러나 과거 우리는 아무리 용을 쓰고 노력을 해도 우리의 구조가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우리가 따라 잡고 오히려 앞서 나아갈 수가 있다.

필자가 정부에서 경제기획국장 시절 제4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만들면서 하도 답답하여 한국경제가 언제 영국의 일인당 GDP를 따라잡을 수 있을지를 장기예측을 해본 일이 있다. 당시 한국은 7~8%의 고속성장을 하고 영국은 2~3%의 성장을 하고 있었지만 1970년대 중반 모수인 한국의 경제규모가 영국에 비하여 워낙 크게 차이가 나 장기시뮬레이션으로도 이를 따라잡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답을 얻었던 경험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작은 규모의 국토와 많은 인구가 경제발전의 부담이었지만 지금은 인력이 자원이다. 한국인의 특성인 창의성과 역동성이 새로운 지식경제시대에 가장 알맞는 코드라고 평가할 수 있다. 무역국가인 한국이 FTA를 하는 것은 우리의 활동무대을 키우는 것이다. 그 무대가 겷고 만만한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도 아니다. 버거운 상대와도 싸워 이겨야 살아갈 수 있다. 경쟁해서 이겨야 발전한다.

우리가 무서워서 WTO의 DDA 협상에서 우리는 한국의 쌀을 자유무역대상에서 제외시키느라(관세화 대상에서 제외하느라) 얼마나 많은 비용을 지불하였는지 모른다. 안으로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정부에서 줄줄이 농촌지원에 수십조의 지원금을 지원하고, 대신 필요하지도 않은 많은 외국쌀을 사왔는지 모른다. 만일 일본처럼 일찍 쌀을 관세화하였으면(일본은 DDA계획보다 2년 앞당겨 쌀을 관세화하였다) 경제적으로 큰 이익이 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김대중대통령 시절 미국의 영화쿼터 확대에 연화계에서 필사적인 반대를 하였지만 개방을 한 지금 우리 영화계가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는가? 아니다. 오히려 한국영화의 경쟁력이 세계화 된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이 경쟁이다. 이것이 국민을 잘살게 만들기 위한 필요조건인 경제적번영을 가져오게 하는 국가운영의 전략인 것이다. 이제 진보 보수가 싸우는 정치적 이념의 시대를 접어야 한다. 새롭게 맞이한 FTA 시대에 경제적 경쟁을 앞세우는 사회적 이념의 시대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거저 잘 살아진 것이 아니다. 우리 선배들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가 오늘이라면, 우리는 오늘의 경쟁 앞에 신발끈을 다시 매는 각오로 출발해야 한다. 후대들에게 자랑스런 선배가 되기 위해서다.

2011년 11월 5일 토요일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의 역(逆)발상

한미FTA의 한국국회비준동의가 암초에 부딛쳤다. 소위 투자자국가소송제도가 한국의 종소기업활동을 위축시킬 가능성이 있어 한미FTA를 다시 협상하여야 한다는 것이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정당의 주장이고 이런 주장이 이해관계인 그리고 시민운동권과 합쳐져 큰 저항을 하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정부와 한나라당은 한미자유무역협정의 긴급성을 강조하면서 국회통과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한나당이 지배하는 국회의 논의는 상임위원회에서 조차 내용에 대한 토의는 시작도 되지 않고 있고 그저 무조건 물리력으로 저항하는 야권정당의 활동이 판을 치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생사결단을 하고 반대하는 야당 그것도 민주당은 그들의 뿌리인 노무현정부에서 같은 내용의 한미FTA협상을 시작하고 내용면에서 마무리 지었던 그 협정을 이제 와서는 당시는 내용을 잘 몰랐다는 소가 웃을 ISD 핑계를 대며 물리력을 동원하여 반대하고 있다.

ISD는 자기네 정부가 추진했던 협정안에도 이미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고 세계교역활동에 일반화되어 있는 규정이다. 중소기업에게 손해를 볼까봐 반대한다는 것은 일리가 있다. 그것은 미국의 힘 때문에 우리 중소기업이 손해를 볼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이해댱사국에서 균형있는 조정참여제도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고 언론에서 소상하게 지금까지 세계교역에서 ISD가 부당하게 즉 어느 특정국의 힘 때문에 상대국에 불이익이 된 경우가 거의 없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오히려 반대로 한국의 국회가 시장을 힘으로 규제하고자 하는 경우 ISD는 한국기업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골목상인을 보호하기 위한 유통법 상생법 같은 것이 그 예가 될 것이다. 현재 국회에서 발의된 '중소상인 적합업종보호특별법'같은 것도 이루어질 경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 소지가 있을 것이다. 결국 그런 시장을 직접적으로 구분하고 간여하는 정책을 정치적인 이유로 펴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이다.

언제까지 남을 탓하고 내가 하는 잘못된 정책은 생각해 보지도 않는 그런 후진성에서 한국사회는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이렇게 성장하고 발전하였음을 우리만 모른다. 이제 세계의 지도자 반열에 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라도 이런 억지와 비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을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일부 인사들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한국은 앞날이 없다.

결론적으로 민주당이 집권할 때는 자동차공업을 지원하기 위하여 즉 대기업을 지원하기 위하여 ISD를 받아드렸다 즉 중소기업의 피해(자기나름대로 의 판단)를 받아드렸다는 말이 아닌가? 자기가 하면 무조건 선의라고 우기고 있는 서울시교육감의 처신과 무엇이 다른가? 민주당은 곰곰히 생각해야 한다. 거의 많은 언론이 지지하고, 전문가들이 지지하는 한미 FTA 비준을 민주당과 야권정당들은 말도 안 되는 어거지로 반대하지 말고, 생떼를 쓰지 말고 물러서야 한다.

2011년 11월 3일 목요일

다음 대통령의 조건

벌써 내년 하반기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생각하면서 다음 대통령이 되기 위한 조건을 생각하는 것이 성급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주(10월 26일) 치러진 서울시장 보궐선거 결과가 던져준 많은 의미를 되새기면서 벌써 마음은 내년 대통령선거로 치닫고 있다. 서울시장선거의 의미를 언론에서 많이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되풀이 할 필요는 없다. 또 나타난 결과가 민심이라고 전제하고 이제 국가지도자를 뽑는 내년 대선이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대의정치의 표본인 선거제도가 원래 현자(賢者)를 발굴하는 것이 아니다. 다수가 지지한다고 해서 반드시 현자일 수는 없는 이치이다. 오히려 현자가 좌고우면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선거에서 뽑는 지도자가 현자라는 보장은 더욱 없다. 현자보다는 대중에 보다 가깝게 다가가는 대중성이 더 높은 인사가 선출 될 수 있다. 따라서 선거에서 승리하는 인사가 지도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현자라는 보장은 없다.

이명박대통령이 4년 전 현자라는 평가 때문에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라 망가진 경제를 추스를 경제대통령이 되겠다고 스스로 외치고 대중은 그의 그런 치세를 믿었기 때문에 그를 5백만 표의 큰 표차이로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고 할 수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을 지지한 소위 2040 세대의 표심은 망가진 경제에서 자기들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을 현 대통령 탓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언론들은 분석한다.

이명박대통령으로서는 억울하다고 할지 모른다. 경제가 그래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만족스런 결과는 아니지만 선방한 것 아니냐고 할 수 있다. 성장률 물가 수출 국제수지 고용 등 제반경제지표들이 낙제점만은 아니지 않느냐 할 수 있다. 오히려 장기적인 정책제시 없이 무조건 반대만 하고 있는 야권정당이나 이들과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소위 집권정당의 무능을 탓할 수 있다.

이미 내용면에서 판결이 극명하게 들어난 한미 FTA 동의 하나만 보더라도 이것은 시정잡배들의 패거리 논리만도 못한 떼를 써대고 있는 것이 이번선거로 승리했다고 우쭐대는 민주당 등 야권정당의 행태다. 그것을 옆에서 무기력하게 쳐다보는 절대다수의 한나라당은 더욱 한심하다. 국가이익이나 국가발전의 비전은 처음부터 없다. 이것은 정당은 고사하고 붕당이라는 이름이 아까운 잡배수준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올바른 경제정책을 쓸 수 있겠느냐고 대통령은 푸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높은 등록금을 내고 대학을 졸업해야 취직이 되지 않는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는 세상인데 우리네 서민의 앞날은 희망이 없다. 지금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절대빈곤은 없어졌다고 하지만 대신 독거노인의 딱한 사정은 더해만 가고 있다. 젊은이들은 아이를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릴 자신이 없다. 세계에서 1% 부자에 대한 99%의 저항데모(occupy demonstration)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니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직업을 주는, 미래를 주는, 행복을 주는 정치를 해 달라. 정부를 믿을 수 없다. 차라리 기존 제도권정당을 넘어 시민대표(그들은 그렇게 부르고 싶을 것이다)가 서울시장이 되는 것이 옳다고 서울시민은 선택하였다.

자 그래서 박원순씨가 서울시장이 되었다. 시민대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당공천이 없는 그는 선거가 끝나자 민주당에 가서 정신적 민주당원임을 천명하였고, 다른 곳에 가서는 그곳의 정신적 지지자임을 천명하고 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시장으로서 제일 먼저 이번 선거의 단초가 된 초등학교 무상급식을 시행하였다. 민주당이 지배하는 서울시의회와는 짝짜꿍이 잘 맞을 것이다. 행정부 근처에도 와 보지 않았던 그래서 과거에 미국쇠고기수입반대 촛불시위 주동자 등 상식 밖의 인사들로 구성된 시정자문단인지 무엇인지를 발족시켰다. 그들 나름대로 각기 가지고 있는 원(怨) 풀이는 될지 모르지만 그들의 시정자문이 2040의 표심과 어떻게 연계될지 나는 짐작할 수가 없다. 이들이 가져올 관료집단과의 알력, 시의회와의 업무중복, 시 재정의 한계노출 등의 문제를 풀어가는 임무는 시장의 몫일 것이다.

선거에서는 제도권정당을 괴멸시켰는데 현실은 각 정당이 중심이 된 국회에서 싸움은 여전하게 계속되고 있다. 이번 선거의 표심을 읽을 능력도, 성의도 없는 양 과거와 차이가 없는 이전투구가 계속되고 있다. 주권자인 국민의 마음은 이미 기존정당을 떠났는데 아직도 자기들이 주인이라고 대의기관이라고 머리 터지게 싸우고 있다.

이런 정치권이 언제 2040이 절규하는 경제의 회생과 그로 인해 직업을 얻고 가정을 꾸미고 미래를 설계할 꿈을 실현시켜줄 것인가? 더 나아가 ‘행복’이 국가경영의 화두가 되고, ‘공생’하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정의’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또 이번 서울시 선거에서 비록 졌지만 46%에 달하는 5060세대의 표심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나이 먹은 세대의 절박한 복지욕구의 실현, 철통안보 그리고 나라의 정통성까지 훼손하고 있는 전교조, 진보 종북 세력과의 갈등해소 등의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의식 위에서 내년 대통령선거를 생각해보자. 현재의 한나라, 민주, 민노 등기존 정당은 내년 선거에서 존재의미가 많이 퇴색될 것이다. 새로운 정치세력이 새로운 무기(SNS)를 가지고 등장할 것이다.

그들은 다분히 2040을 바탕으로 출발하고 그들의 요구를 외치면서 세를 결집할 것이다. 모르기는 해도 이들의 요구를 일찍 간파하고 그들과 한통속이 되는 인사나 세력이 집권할 가능성이 클 것이다. 다분히 퍼퓰리즘적 색채가 강한 집단이나 세력이 될 것이다. 이들은 현실적 능력의 한계 같은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수요측면에서 젊은이들에게 다가갈 것이다. 그리고 함께 외쳐댈 것이다.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기보다는 국가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라고 억지에 가까운 요구를 들고 나올 것이다. 이런 세력이 강력할수록 이와 반대로 보다 원리주의적인 세력이나 집단이 반대편에서 나타날 것이다.

이제 사회주의니 진보니 하는 이념적 흐름은 선거에서 많이 퇴색되고 행복이니 정의니 복지니 하는 보다 주관적이고 자기이익적인 구호가 선거의 어젠더가 될 것이다. 인기영합이 선거판세가 될 것이다.

이런 전제 하에 내년 다음 대통령이 되어야 할 인사의 덕목을 원론적인 입장에서 정리하여 보자. 이제 국가운영의 기본이념을 ‘번영을 통한 개인의 복지향상’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진보 보수의 이념은 지나간 흐름이다. 항차 김정일 정권이나 북한의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적 추종세력은 국가운영의 우선순위 대상에서 밖으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 남한의 발전이, 국방이 북한을 뛰어넘었음을 의미한다. 글로벌경제운영은 EU가 어떻던, 미국이 어떻던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남은 과제는 경제적 번영이다. 그 번영이 국민 개개인의 복지에 연계되는 그런 사회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의식 위에 다음 대통령이 갖추어야 할 정책적 덕목을 정리하여 보자.

무엇보다 성장 동력을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잠재성장률을 최소한 5~6% 대로 끌어올릴 수 있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구축하는 일이 새 대통령의 초미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최소한 5~6% 대의 경제성장 없이 한국경제가 번영에 도달할 수는 없다. 최근 한국정부가 이 성장동력을 살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개개인의 삶이 핍박해지고 그러니 무언가 얻어가지고자 하는 의타심이 자꾸만 확대되어 복지욕구는 자꾸만 거세어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장 없이 고용이 될 수 없고 재정이 확충될 수 없다. 그러니 자연 네몫 내몫 서로 다투게 되고, 사회는 피폐의 사슬이 늘어만 가게 된 것이다.

성장동력은 우선 우리의 노동력과 새로운 성장판을 구축하는데서 찾아야 한다. 생산요소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노동은 한국의 인구전망과 인구구조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토지 노동 자본의 최적집합의 결과인 생산확대는 기술이라고 하는 외생변수에 영향을 받게 된다. 기술의 진보가 단순회귀적인 성장확대의 결과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격상되는 기술의 폭발적인 생산기여를 최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을 새로운 성장판이라는 용어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는데 적절한 표현 같아서 나도 이렇게 부르고자 한다.

1. 개방된 이민사회 구축

2011년 10월 현재 한국의 인구는 50.699.478명이라고 행정안전부의 통계는 전한다. 남녀의 성비는 1:1이고, 60세 이상 인구는 전체인구의 15%수준이다. 합계출산율은 2010년 현재 1.23으로 세계에서 몇째 안가는 저출산국이다. 통계적으로는 2018년부터 인구가 정체하여 하락하기 시작한단다. 인구증가율이 1% 이하가 되기 시작한 1995년 이후 23년 만에 한국의 인구는 줄어들기 시작하게 된다. 아시아에서 일본을 빼 놓고는 한국이 가장 앞장선 인구 감소국이 될 것이다. 더욱 두려운 것은 앞으로 50년 후 정도 되면 인구감소에 따라 지구상에서 대한민국 민족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온다.

출산율이 1에 근접하는 것은 남여 두 사람이 겨우 한사람의 인구를 증가시키는 것이므로 이런 추세가 지속될 경우 인구의 감소는 급속도로 이루어질 것이다. 거기다가 노령화추세가 지속되어 인구구조는 노령인구사회로 변화되어 간다. 기획재정부 자료에 의하면 2010년 현재 한국의 65세 이상 인구의 전체인구 비율은 11.3%로 고령화사회(7%)를 지나 고령사회(14%)에 다가가고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20세 이상의 경제활동인구가 65세 이상 노인 1인을 부양하는 인구수가 2000년 10명이던 것이 2050년에는 1,4명으로 줄어든다고 한다. 세계평균예상 4명수준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젊은이 1인이 노인 한 사람을 부양해야하는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다. 또 다른 자료(미국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 CSIS)에 의하면 한국노인의 빈곤율은 45%로 OECD 평균 13.3%의 네 배 수준이라고 한다. 그만큼 국가부담이 크다는 이야기가 된다. 반면 IMF 분석에 의하면 노인 1%가 증가할 때 평균적으로 1인당 실질GDP는 0.041% 포인트 감소하고, 재정수지는 GDP 대비 0.46% 포인트 악화된다고 한다. 성장은 줄고 재정부담은 커진다는 결론이다.

복잡한 소리 할 필요 없이 한국사회는 이미 노령사회로 진입하고 있고 이것이 미래의 번영에 큰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에 대비하는 대책이 시급한데 한국사회는 깜도 안 되는 정당패거리 이익에 온통 관심이 쏠려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이명박대통령은 리먼사태 후 세계적 경제위기 앞에서 한국사회의 구조변화를 읽지 못하고 옛날 방식대로 고환율 수출정책에 매달렸다. 그러니 부익부 빈익빈이 되고 고용은 확대되지 않고 있다.

다음 대통령은 한국의 인구전망과 구조변화를 심각하게 주시하여야 한다. 그 대비는 산업구조의 변화와 개방이민정책에서 찾아야 한다. 산업구조의 변화는 기술력의 확충이고 고령인구의 활용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의 경쟁대상국인 중국 독일 불란서 등이 모두 고령인구의 구조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사회는 고령자가 사회의 부담(Liability)만 되게 할 것이 아니라 부가가치를 증식시키고 사회를 리드하는 자산계층(Asset)이 되도록 만들어가야 한다. 산업구조 사회구조의 변화를 유도할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전략과 계획을 마련해야 할 임무가 다음 정부에 있다.

그리고 한국사회를 보다 젊고 역동성 있게 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이민정책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과거 소극적인 3D 현상의 보완대책으로서의 외국노동자의 유입정책이 아니라 한국사회를 다문화사회로 만든다는 각오로 유능한 젊은이들을 흡입하는 정책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많은 기존질서와 문화의 저항이 있을 수 있다. 이를 함께 아우르는 리더십 발휘가 필요한 대목이다. 다음 대통령이 새로운 산업구조와 사회구조를 만들기 위한 전략과 개방된 이민사회를 구축할 지략을 갖춘 인물이 되기를 고대한다.

2. 새 성장판의 구축

IT기술혁명 이전까지는 기술은 생산요소의 보다 효율적인 집합을 위한 보조수단으로 작용하였다고 하여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정보혁명은 IT기술의 혁명을 가져왔고 이는 생산체제를 스스로 변화시키고 이끌어가는 주체적 기능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글로벌경제를 가능하게 하고 우주사업을 가져오게 하는 것도 IT기술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경제정책의 기본은 정책변수의 결합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기술이나 자원 인구 등 외생변수들이 중요하게 작용하지만 과거에는 그 보다는 금리 환율 통화 세율 등 경제 내생변수들이 정책추진에 직접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단기적으로 정책의 내생변수 중심의 경제운영을 하는 것이 정부의 중요한 정책기능이었다.

그러나 정보통신기술의 개발 이후 기술은 생산요소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되어간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지각변동에서 새로운 지각판과 같은 작용을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IT기술은 최근 다시 도약하면서 바이오(Bio), 융합기술(Convergence) 등으로 전이되어간다. 이것은 또 하나의 지각변동을 가져오는 새 성장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반면 국가운영전략으로서 이러한 새로운 변화의 트렌드를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데 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이런 변화의 흐름을 읽지 않는 나라나 정부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런 트렌드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정책화시키느냐 하는 것은 그 나라 최고지도자의 리더십에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천연자원의 제약보다는 국가를 운영하는 인재의 제약, 첨단기술을 활용하는 정책운용의 제약이 21세기 국가의 번영을 좌우하게 된다. 그것을 다루고 그것을 통하여 사회를 발전시켜 나아가는 인재(human resources pool)와 기술력(technology pool)을 함양하고 발전을 극대화시키는 지혜를 다음 대통령이 지녀야 할 중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다.

3. 국가운영체제(legitimacy)의 변화 시도

다음 대통령은 국가운영체제(Legitimacy)를 새롭게 구축하는 지도자가 되기를 바란다. 사회는 다원화되고 다문화국가로 변모되어가고 있다. 기능이나 기술이 더 중요시되고 존경받게 된 사회다. 거기에 걸맞도록 기존의 국가운영체제를 재검토하고 변화시켜가야 한다.

그러나 이런 근본적인 변화의 시도는 기존질서로부터 많은 저항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을 5년 통치의 단임 대통령에게 모두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도를 함으로써 향후 이런 개혁과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단초를 만드는 것은 다음 대통령에게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몇 가지 현실적과제를 생각해보자.

첫째 정치제도의 개혁이다. 정치는 이제 과거 소수의 정치지도자에 도열하고 따라가는 패거리정치가 아니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개별적 욕구는 다양하게 분출되고 이것은 SNS 같은 도구가 매체가 되어 여론을 형성하고 전달한다. 마치 경제학에서 말하는 어려운 가정일수록 엥겔계수가 높은 것처럼 사회가 발달한 지금 정치계수는 대폭 낮아져야 한다. 정치인은 더 이상 사회의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의 직업인으로 취급 되어한다. 이런 인식의 토대 위에서 국회나 정당의 기능이 재조정 되어야 한다.

둘째 반대로 시장의 기능이 더 확대되고 시장의 질서가 더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 시장의 원칙은 원론적으로 자유로운 가격정책과 공정거래제도에서 찾아야 한다. 수요와 공급에 의한 자유로운 가격결정, 경쟁을 제한하고 시장을 왜곡하는 불공정거래에 대한 철저한 응징만이 시장의 기능을 지키고 활성화하는 원칙이다. 요즘 유행하는 공생이니 공영이니, 더 나아가 제4자본주의니 정의니 하는 화두들이 듣기에는 화려하고 현학적이지만 결국 시장경제의 기본철학이 될 수 없다. 이런 원론적 원칙을 지킬 수 있는 대통령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원칙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는 대통령을 고대한다.

셋째 정부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되 질서를 지키는 일은 보다 기능적으로 하도록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 떼를 쓰고 불법을 저지르는 것을 관용하는 사회는 번영을 가져올 수 없다. 특히 시장 질서를 지키지 않는 불공정거래행위나 탈법 탈세 등 행위는 정부가 반드시 근절시키는 단호함을 지켜야 한다. 정부의 경제운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개인의 행복, 정의 등 다소간 주관적인 도덕성 가치의 문제들이다. 이것에 너무 치우칠 수도 없고 물론 그렇다고 외면할 수는 없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정부의 경륜이고 능력이라고 평가한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운영의 담임이 밖에서 보듯 간단한 것이 아니다. 능력 있는 지도자, 확고부동한 관료집단(bureaucracy)이 필요한 것이다. 시민운동 한다고 비판만 하던 사람이, 데모만 해본 사람이 반드시 훌륭한 국가운영자의 요건이 될 수 없음이 여기에 있다.

이상 내년 다음 대통령이 가져야 할 덕목을 정리하여 보았다. 만일 이러한 리더십 발휘를 약속하는 정치인이 있다면 나는 그가 어느 정당이나 정파에 속하던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운동하고 지지할 것이다.

오늘 아침 그리스의 퍼퓰리즘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세계 언론은 전한다. 대학원 교육까지 100% 공짜로 하여주니 보통 학생은 7~8년 학교에 다닌단다. 그리고 할 수 없이 졸업하면 월 우리 돈으로 9십만 원 가량의 아르바이트 직을 구한단다. 그래서 정부가 할 수 없이 공무원 수를 늘리고 늘려 현재 전체 고용원의 24%가 공무원이 란다. 그러니 그 공무원이 감원 앞에 각목을 들고 데모대에 앞장서 있다고 오늘 아침 언론은 전한다. 이것이 퍼퓰리즘의 실상이다. 한번 남의 덕으로 살아본 사람은 평생 제 노력으로 무엇을 이루려 하지 않는다. 조상의 재산만 파먹고 사는 오늘의 그리스 인들, 1인당 GDP가 4만불이 넘는 부자다. 지금 그들은 독일에 불란서에 그리고 세계에 구걸하고 있다.